전쟁과 인간 - 전쟁이 바꿔버린 무수한 삶과 가능성 - 도리스 레싱의 삶과 문학
노벨문학상 작가 부모 헌정 마지막 소설
1차 대전 때 유탄에 다리 잃은 아버지
야전병원 간호사로 부상병 돌본 어머니
작품 속 주인공 삼아 더 나은 삶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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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영국 작가 도리스 레싱(1919~2013)은 여섯 살 때 가족과 함께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남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로 이주해 그곳에서 성장했다. 아프리카의 척박한 삶과 대자연은 레싱의 삶과 글쓰기에 커다란 자양분이 됐다.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 노예 노동, 전염병 등을 겪으면서 레싱은 세계의 부조리에 눈을 떴고, 보수적인 부모와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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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싱은 1950년에 발표한 데뷔작 『풀잎은 노래한다』에서 식민지에 정착한 백인 부부의 혼란과 실패를 다루면서 흑백 인종차별을 비판했다. 1952년부터 1956년까지 다섯 권으로 나눠 발표한 『폭력의 아이들』 시리즈는 아프리카에서 자라 영국에 정착하는 ‘마사 퀘스트’라는 인물의 생애를 그린 자전 소설이었다. ‘마사 퀘스트’는 부모를 등지고 가출해 아프리카 사회에서 활동하고 영국에 정착한 레싱 자신의 페르소나였다.
1930년대에 영국으로 돌아온 레싱은 경제 대공황 시기의 극심한 빈부격차를 목격했다. 그녀는 잠시 공산주의에 심취했으나 스탈린의 폭압 정치와 제2차 세계대전 시기를 거치면서 드러난 소련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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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싱은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슬람 계열 신비주의인 수피즘에 관심을 가졌다. 지상의 인류와 상상 속 다른 행성의 삶에 대한 인식을 고양하면서 『생존자의 회고록』 『아르고스의 카노푸스』라는 SF 디스토피아 소설을 창작했다. 이 소설들은 당시 미·소 냉전이 야기한 핵전쟁의 공포와 맞물리면서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또한, 레싱은 당대의 전통적 사회질서와 편견에 짓눌린 여성들의 위태로운 삶을 그린 단편소설집 『19호실로 가다』(1978), 런던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을 다룬 단편집 『런던 스케치』(1992) 등을 출간했다. 식민지 아프리카에서 유년기를 보내면서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던 경험은 그녀가 소외된 약자들을 응시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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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을 받은 직후 레싱은 『앨프리드와 에밀리』(2008)를 발표했다. 이것은 레싱이 세상에 발표한 마지막 소설이 됐다. 이 소설은 20세기 초반 ‘앨프리드’와 ‘에밀리’라는 평범한 남녀의 이야기다. 레싱은 어린 시절 자신과 그토록 불화했던 부모를 다뤘다. 레싱의 부모는 서로에게 잘 맞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꿈꾼 삶을 살지 못했다. 그들은 갖은 고생을 하면서 삶을 보내야 했다.
레싱은 마지막 소설 『앨프리드와 에밀리』를 자신의 부모에게 헌정했다. 레싱의 아버지 앨프리드 테일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솜 전투에 참가했다. 참호에 떨어진 유탄에 맞아 한쪽 다리를 잃은 레싱의 아버지는 평생 의족을 달고 살아야 했다. 레싱이 어렸을 때 아버지 앨프리드는 솜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탓에 이프르 전투(1917)에 빠질 수 있었고,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고 회상하곤 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귀환했지만, 불구의 몸으로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거의 없었다. 앨프리드는 페르시아에서 은행원을 하다가 아프리카 식민지 남로디지아의 옥수수 농장을 인수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옥수수를 키워서 팔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정부의 홍보를 믿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척박했고, 앨프리드는 사업수완이 별로 없었다.
한편 레싱의 어머니 에밀리 맥비는 학창 시절 줄곧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지만, 억압적인 부모가 강요하는 삶을 거부했다. 에밀리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가출해 간호학교에 지원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에밀리는 야전병원에서 부상병을 돌보는 간호사로 일하게 됐다. 레싱의 부모 앨프리드와 에밀리는 병원에서 부상병과 간호사로 만나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전쟁은 두 사람이 예전에 원하던 삶을 완전히 파괴해버렸다.
종전 후 두 사람은 페르시아를 거쳐 아프리카로 가서도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들의 딸인 레싱도 불안정한 성장기를 보내야 했다. 어머니 에밀리는 아프리카에서도 영국식의 세련된 삶을 딸에게 강요했고, 레싱은 어머니의 극성에 넌더리를 냈다. 사업수완이 부족한 아버지 앨프리드는 농장을 효율적으로 운영하지 못했다. 백인 지배층의 오만함을 버리지 못한 아버지는 농장에서 일하는 흑인 인부들과 마찰이 잦았다. 레싱은 그런 가정을 거부했고, 13세에 학교를 중퇴했다. 혼자 책을 탐독하고 자립하면서 레싱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레싱의 글쓰기에서 ‘전쟁’ ‘차별’ ‘약자’는 평생 중요한 화두가 됐다.
2007년, 88세의 최고령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레싱은 마지막 작품을 쓰면서 부모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했다. 『앨프리드와 에밀리』는 ‘만약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앨프리드와 에밀리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라는 가정으로 적은 소설이다. 레싱은 소설의 제1부에서 평생 자신과 불화했던 어머니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한다. 소설 속에서 에밀리는 억압적인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떠나 홀로 런던의 간호학교에 진학하고, 의사와 결혼한다.
남편이 사망한 후 에밀리는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으로 자선 학교를 설립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간다. 전쟁으로 다리를 잃고 평생 후유증에 시달렸던 아버지 앨프리드도 소설에서 새로운 삶을 찾는다. 소설 속 앨프리드는 갖가지 운동을 즐기는 스포츠맨이자 춤꾼이다. 앨프리드는 현명한 아내와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리면서 평범한 영국 농부로 살아간다. 소설 속에서 앨프리드와 에밀리는 부부가 아니라 이웃 친구로 그려진다.
레싱은 부모가 살지 못한 삶을 소설로 재현하면서 그들의 삶을 연민했다. 소설의 제2부에서는 도리스 레싱의 회고로 구성됐다. 상상과 현실의 괴리를 해설하는 제2부에는 부모를 향한 연민과 사랑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부모가 다른 상대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탄생을 부정하는 불온한 상상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부모의 삶에 깊은 연민을 느껴 본 사람들은 안다. 부모 역시 자신의 꿈대로 살지 못한 무수한 사람 중 하나라는 사실을 말이다. 전쟁을 겪었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다시, 6월이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을 읽으면서 70여 년 전에 겪은 전쟁을 다시 생각한다. 『앨프리드와 에밀리』의 전제처럼, ‘전쟁이 없었더라면’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전쟁이 없었다면, 우리의 부모와 조부들은 다른 삶을 선택하고 더 행복한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전쟁의 기억은 아직도 우리의 현재를 잠식하고 있다. 서로를 증오하며 부정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영원히 고향과 가족을 찾지 못하고 삶을 마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전쟁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편은 ‘가능했던 삶’들을 상상하는 일이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이정현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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