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 베트남 ③
1954년 군사분계선에 월남·맹 분단
케산·꽝트리 등 격전지엔 전쟁 흔적
베트남판 ‘돌아오지 않는 다리’
교량 중앙 흰색 페인트 표시만 남아
땅굴 빈목터널은 ‘항전의 표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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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이 끝나면서 일본군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38도선이 한반도 허리를 끊었다. 이 분단선을 경계로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첨예하게 대립했다. 결국 전쟁으로 새로운 휴전선이 그어졌다. 베트남의 북위 17도선 역시 비슷한 역사적 배경을 가졌다. 1954년 7월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 후, 이 선을 기준으로 남·북 2㎞ 폭의 비무장지대가 생겼다. 남베트남(월남)과 북베트남(월맹)은 다른 정권을 수립했고,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이 발발했다. 오늘날 17도선 주변인 케산·꽝트리·동하지역 격전지는 참전용사와 군사 마니아들이 찾는 관광명소로 탈바꿈했다.
베트남 비무장지대 격전지를 찾아서
라오스 국경 부근의 케산은 후에에서 150㎞ 떨어져 있다. 1968년 1월 21일 시작된 케산전투는 공산군이 1월 30일 구정공세 이전, 미리 계산한 양동작전이었다. 약 6개월 전투에서 연합군은 3000명, 공산군은 1만5000여 명의 전사자를 남겼다.
후에의 호텔에서는 케산과 비무장지대 여행안내서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케산 답사의 교통편을 두고 고민하던 차에 구세주 같은 정보였다. 아침 일찍 출발해 꽝트리·케산·비무장지대·빈목터널을 돌아본 후 저녁에 돌아오는 답사코스를 선택했다. 여행경비 50달러(한화 약 6만5000원) 속에는 점심까지 포함됐다. 안내자 홍(Hong)을 포함해 독일·체코·스페인·한국인 각 1명으로 구성된 답사팀이다. 외국 청년들이 베트남 전쟁역사에 관심을 갖는 것이 신통했다.
소형 버스가 1시간30분을 달려 꽝트리에 도착했다. 옛 성곽 안으로 들어가니 북베트남군 참전용사들이 추모탑 앞에서 참배 중이다. 봉분 형태의 추모시설 아래에 AK 소총과 전투배낭 1세트가 전시돼 있었다. 배낭 뒷부분에는 긴 젓가락 1쌍이 삐쭉이 솟아 있다. “이 젓가락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전투 장비다. 왜냐하면 먹어야 살 수 있으니까?”라고 농담했다. 그 순간 독일 청년이 두 손가락을 내밀며 끼어든다. “아니죠. 전쟁터에서는 이 손가락 수저가 더 유용합니다”라고. 역시 실용적인 독일인다운 발상이다.
‘제2의 디엔 비엔 푸’ 케산의 전쟁 유적
버스는 다시 케산으로 향했다. 2차선 도로는 계곡과 산길의 연속이다. 전쟁 당시에는 1차선 비포장도로였다. 케산까지 육로 수송은 불가능했다. 적의 매복을 뚫고 험준한 길을 따라 보급 차량이 통과하는 것은 자살행위다. 공중보급 외는 선택 여지가 없었다.
한참을 가니 해발 240m의 록 파일(Rock Pile)이 나타났다. 비무장지대에서 16㎞ 떨어진 이 바위산에 미군 경계부대가 포진했다. 오전 11시경 드디어 케산에 도착했다. 황량한 벌판 위에 기념관과 CH-47 헬리콥터와 C-130 수송기만 덩그렇게 남아있다.
호찌민 보급로 차단 목적의 케산기지에는 미 해병대 3500명과 남베트남군 2100명이 주둔했다. 비행장을 갖춘 원형기지 주변 4㎞까지 전초부대를 내보냈지만, 적 2개 사단의 포위 공격은 집요했다. 라오스 내의 적 동굴포병은 끈질기게 포격을 퍼부었다. 남베트남군이 라오스로 진격했지만, 포병진지를 제거하지 못했다. 1일 300회의 공중보급에 투입된 항공기는 수시로 추락했고, 낙하산 투하 화물의 상당량이 적진에 떨어졌다. 차선책으로 수송기는 지면을 스칠 듯한 낮은 고도에서 보급품을 활주로에 내동댕이쳤다.
1968년 4월 초 미 제1기병사단 투입으로 북베트남군은 비무장지대 북쪽으로 퇴각했다. 하지만 구정공세·케산전투의 생생한 언론 보도는 미국의 반전여론에 불을 붙였다. 덕분에 미국은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전쟁에서 패배’하는 치욕을 감수해야만 했다.
비밀보급로 ‘호찌민 루트’
케산 주변에는 작은 마을들이 있었다. 안내자가 전하는 전쟁 당시 민초들이 겪은 비극이다. “케산 주민의 절반은 남베트남군으로 징집되고, 나머지는 베트콩에게 끌려갔다. 형제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내 아버지도 고등학교 3학년 때 남베트남군에 입대했다”라고. 용산 전쟁기념관 형제(형은 국군장교·동생은 의용군) 사연의 판박이다.
다시 동쪽 비무장지대를 향해 달리는 다끄롱 강변도로 옆은 험준한 산비탈의 연속이다. 그 산속에는 하노이와 사이공을 연결하는 비밀보급로 ‘호찌민 루트’가 있었단다. 이윽고 편편한 해안 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니 벤하이강이 나타났다. 이 강에는 베트남판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있었다. 교량 중앙에는 군사분계선을 표시한 흰색 페인트가 남아있다. 분단의 아픔을 모르는 외국인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분계선을 밟으며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빈목터널과 전시 생활
군사분계선을 넘어 자동차로 20분 정도 북으로 올라가면 빈목터널이 나온다. 1965년부터 미군 폭격을 피해가며 농기구로만 2.8㎞의 지하갱도를 19개월 만에 건설했다. 호찌민시의 꾸찌 터널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다. 지하 18~26m의 갱도는 3단계 높이로 만들어졌다.
갱도 안 불빛에 의지해 화살표를 따라가던 중 갑자기 누군가 내 등을 친다. “깜짝이야!” 소리치며 돌아보니 키 작은 베트남인이 바구니 속의 아기 사진을 보여준다. 그 신생아가 갱도 안에서 태어난 자신이란다. 안내를 자청하는 그를 따라 출구로 나서니 탁 트인 바다가 나왔다. 이 터널은 지상으로 6개, 바다로 7개의 출구가 있다. 1966년 이후 6년간 이 마을은 9000톤의 폭탄 세례를 덮어썼다. 튼튼한 갱도 덕분에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었고, 대신 17명의 신생아가 태어났단다. 끈질긴 베트남인의 항전의지를 압도적인 군사력만으로는 꺾을 수 없었다.
평화회담의 허구성과 내부의 ‘적’
꽝트리 추모탑 앞에는 ‘파리평화회담’을 상징하는 독특한 조각상이 있다. 큼직한 펜을 쥔 손가락이 ‘Paris 1973’이라고 서명하는 형상이다. 미군 철수와 공산군의 남베트남 주둔을 허용하는 이 회담으로 북베트남은 티우(Thieu) 정권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협정 준수를 위해 8개국(영국·프랑스·소련·중국·캐나다·이란·헝가리·폴란드)이 보증을 섰지만, 공산세력은 활개를 쳤다. 무력충돌은 계속됐고, 반공인사가 밤사이 살해되어도 속수무책이었다. 남베트남은 공산세력의 눈치를 보는 무서운 사회로 변했다.
군대·경찰에서 암약하는 간첩들은 ‘우리 민족끼리’를 앞세우며 교묘하게 반정부시위를 선동했다. 1974년 12월 북베트남군 2개 사단의 시험공격에 남베트남군은 썩은 고목처럼 무너졌다. 평화협정을 어기면 “하노이를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미국의 약속은 공염불이었다.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은 지구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신종태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은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60여 개국을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적지를 찾아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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