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소중한 친구들이 있다. 사뭇 성향이 다르고, 개성도 독특하다. 그러나 서로에게 늘 진심이고, 투명한 그 마음이 훤히 보인다. 덕분에 내 삶의 많은 부분이 놀라운 즐거움과 웃음으로 채워진다. 그래서 고맙다. 그중 한 친구는 유독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낯가림이 있다. 또 혼자 밥 먹는 것을 유난히 어색해한다. 자타가 공인하는 군 인사업무 전문가로서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의 보직과 진급에 대한 고민과 상담을 했을 터인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요 며칠 여행을 함께 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어서 더 놀라웠다. 내가 둔감한 것인지, 아니면 친구가 자신의 속내를 구태여 꺼내놓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일상을 벗어나 긴 여행을 함께 해보면 상대방에 대해 무심히 지나쳤거나 그간 잘 알지 못했던 것을 자연스럽게 아는 기회가 생긴다. 여행은 또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며, 심연(深淵)의 나를 만날 수도 있게 한다. 친구는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과 한 끼를 때우는 것은 삶의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상당한 시간과 공을 들여서 내게 설명한다. 낯가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혼밥’을 어색해하는지 비로소 친구의 속내를 자세히 알게 되는 순간이다.
일본 작가 헨미 요(邊見 庸)는 사람들이 음식을 씹고, 쩝쩝거리는 서로 다른 삶의 풍경 속으로 스며 들어가 그들의 음식을 함께 먹고 마시며, 거기서 발견한 인간들의 다양한 드라마를 책으로 펴냈다. 그 책이 『먹는 인간』이다. 그는 ‘먹는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고, 먹는 행위인 식(食)을 ‘삶의 근원’이라고 한다. 그는 ‘사람들은 어디서, 무엇을, 어떤 얼굴로 먹는가? 하루하루 음식을 먹는 당연한 행위를 어떻게 의식하고 있을까? 먹는 행위를 둘러싸고 세계 곳곳에서 어떤 변화가 싹트고 있는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역 분쟁은 먹는다는 행위를 어떻게 짓누르고 있을까?’에 남다른 시선과 관심을 뒀다. 메라비언의 의사소통 모형에 의하면 7%는 대화의 내용을 통해서, 38%는 음성이나 억양 등 말투에서, 55%는 표정·자세 등 비언어적 신호로 상대에게 전해진다고 한다. 식사할 때는 함께하는 이들의 다양한 내면의 감정이 말과 몸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나고, 나의 의사도 상대방에게 효율적으로 전달된다. 따라서 식사를 함께하는 것은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가장 빨리 파악할 수 있는 지혜의 도구다. 헨미 요는 맛의 기억을 담은 개인사를 오랫동안 한 식탁에서 천천히 이야기하면 할수록 고단한 삶에 지쳐서 날카롭던 할머니들의 눈매가 부드러워지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을 때는 적대감마저 줄어들고, 긍정적인 감정이 유발되는 것을 느낀다. 함께하는 밥은 시공간을 초월해 서로를 기꺼이 맞아들이는 관용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함께 밥을 먹는 행위에는 ‘소통’ 이상의 상대에 대한 ‘믿음’이 전제돼있는 것이다.
삶을 이어가는 먹는 행위(食)와 더불어 ‘시간과 때’라는 의미의 크로노스(Kronos)와 카이로스(Kairos)는 고대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깊은 고민거리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생물학적 유한성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음이 그 이유다. 이런 유한성의 한계를 극복하려면 신(神)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허락한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관건이다.
밥이 ‘함께하는 그 이상의 의미’임을 일깨워준 친구는 내일이면 나와 아내를 그가 준비한 카이로스의 잔치(때)에 어김없이 초대할 것이다. 난 그를 위해 파울루 프레이리의 『망고나무 그늘 아래서』를 선물할 것이다. 삶의 품위와 의미를 평가하는 카이로스의 저울은 내 삶의 무게 어디쯤을 가리킬까를 생각하게 하는 오늘이다.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