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조명탄_정상원 셰프] 기사식당 불백

입력 2023. 03. 17   16:29
업데이트 2023. 03. 17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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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원 맞는맛연구소 셰프
정상원 맞는맛연구소 셰프


잉글랜드 최남단 포츠머스 항구는 영국과 프랑스를 연결하는 물류 허브 중 하나다. 여타 유럽의 여객 터미널이 여행자의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면, 포츠머스 터미널은 거대한 화물차들이 줄지어 서 있는 거친 노동의 현장이다. 항구의 끝에는 검은색 해적 깃발이 펄럭이는 기사식당이 하나 있다. 이곳은 노동자들이 허기를 달랠 수 있는 항구 구내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식당이다. 메뉴는 단출하지만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다. 

커다란 뼈다귀가 그대로 붙어있는 정강이 스튜는 오랜 시간 조리해 소스의 깊이와 고기의 풍미가 상당하다. 가니시(garnish)로 곁들인 완두콩과 감자는 영국답지 않게 간이 딱 알맞아 재료 본연의 맛이 오랫동안 입안에서 감돈다. 흘린 땀을 보충할 염분, 노동 직후의 입맛을 급격히 돋우는 감칠맛, 충분한 칼로리와 조화로운 영양, 편안하게 소화할 수 있게 조리하는 배려. 무릇 기사식당은 맛있기 마련이다.

요리사들은 해외 셰프들과의 교류와 현지 음식에 관한 공부를 목적으로 여행하는 경우가 많다.

허브 오일에 담가 오븐으로 열댓 시간 천천히 조리한 꺄냐드 콩피, 초원에서 방목으로 키운 어린 양 갈비 꼬뜰레트 다뇨, 세계 최고의 진미로 꼽히는 거위 간 푸아그라 스테이크, 브르타뉴 버터로 조리한 달팽이 에스카르고. 뭇사람들은 아름답게 기획되고 단단하게 조리된 새로운 메뉴를 테스팅 하는 일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시식이라는 것이 짧은 일정 안에 집중되다 보면 어느 순간 감각의 노동이 돼버린다.

미식의 여정이 끝나고 나면 이동 중에 내 몸을 위해 먹었던 기사식당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오랜 시간 운전을 하다 끼니를 때우기 위해 우연히 들어간 도로변 식당의 푹 삶은 아스파라거스 한 접시는 고기도 소스도 없었지만 꿀떡꿀떡 잘도 들어갔다. 부다페스트 기차역의 태국 식당에서 벌컥벌컥 마신 너무나 고팠던 차가운 물 한 잔은 아직도 그 맛이 뚜렷하다. 느낌의 만족은 결국 그것을 먹는 시간의 내 상황에 달린 것 아닐까.

그간의 경험을 생각하며 프랑스인 직원들과 기사식당을 종종 찾는다. 돼지 불백, 양념 장어, 갈치조림. 기사님들을 위한 메뉴판을 훑어보면 편안하게 소화할 든든한 음식들에 고개가 끄떡여진다.

기사식당에서 프랑스 직원의 최애 메뉴는 단연 돼지불고기 백반이다. 매콤 단짠 소스에 오랜 시간 재웠다가 석쇠에 구워낸 불고기는 혀끝을 간지럽힌다. 얇게 저민 고기는 부드럽기가 그지없다. 소스를 한술 떠 공깃밥에 쓱쓱 비빈다. 맛있다. 꼭꼭 씹어 천천히 음미하며 먹고 싶지만 어느새 입속에서 사라지고 없다. 쩍 벌린 입에 쌈장을 올린 불고기 쌈을 한 입 넣으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눈빛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내 몸에 맞는 맛을 만났을 땐 눈동자가 다르다. 열심히 조리한 내 요리보다 훨씬 좋아하는 모습에 조금은 서운한 마음도 들지만, 저 맘을 십분 안다.

시인 황지우는 파고다 공원의 국밥집을 바라보며 노래했다.

“몸에 한세상 떠 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에서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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