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조명탄_김은경 작가] “가입시데이, 가입시데이”

입력 2023. 03. 16   15:04
업데이트 2023. 03. 16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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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작가
김은경 작가

 

운전면허를 딴 지 2년, 차에 시동을 걸기 전에 하는 루틴이 있다. 일단 차와 짧게 대화를 나눈다. 오늘은 내가 차를 지켜줄 것인지, 차가 나를 지켜줄 것인지 서로의 롤을 정하는 게 목적인데 다들 차와 이 정도는 대화… 하시죠? 그날의 롤을 정하면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가입시데이”를 중얼거린다. 평소 자아와 운전할 때 자아는 다르다는데 경기도인인 내가 운전할 때 사투리를 쓰는 이유는 나의 사랑하는 경상도인들과 관련 있을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경상도 사람이고 호랑이 같은 남자 형제가 셋 있다. 삼촌들은 몸도 크고 제스처도 크고 목소리는 더 컸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늘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예를 들어 내가 밤 9시에 삼촌이 만든 김치수제비가 먹고 싶다고 엄마한테 소곤소곤 말하면 삼촌은 누워서 TV를 보다가 “은겨이가 김치수제비를 묵고 싶어 한다꼬?” 하고 오밤중에 버럭 소리를 쳤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커다란 손으로 밀가루를 퍽퍽 반죽해 빨간 수제비를 척 내어준다든가, 밤 10시가 넘어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면(시골 밤, 화장실은 꽤 무섭다) 엄마 아빠는 으레 내 눈을 피했지만 삼촌 중 한 명은 “은겨이 니 화장실 가고 싶다꼬?” 하고 친척들이 다 들을 만한 데시벨로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이미 현관 밖에 서서 “고마 삼촌이랑 가자! 후딱 나온나 카이” 하며 내가 슬리퍼를 신는 것을 기다려 주는 식이었다.

그중에서도 삼촌들의 벼락같은 사랑에 정신이 몽롱해진 적이 있다. 우리 형제는 그림을 그릴 때만은 조용했기 때문에 엄마와 아빠는 경상도에 오면 읍내에 나가 스케치북을 사 왔다. 그런데 그날은 언니들에게만 스케치북을 나누어 주는 게 아닌가! 엄마는 내 스케치북도 계산했으나 깜빡하고 문구점에 두고 왔다고 말했다. 여기가 집이었다면 울고불고 난리를 쳤겠지만 이곳은 경상도고, 나는 친척들에게도 낯을 가리는 아이였다. 조용히 방에 들어가 언니들이 찢어준 스케치북 낱장에 종이인형의 집을 그리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미닫이문이 퍼러럭 열렸다. 그러더니 삼촌들 중에서도 가장 키가 크고 목청 좋은 대장, 첫째 삼촌의 목소리가 방 안 가득 쩌렁쩌렁 울렸다.

“우리 은겨이 스케치북을 놔뚜고 왔다꼬? 은겨이 니 스케치북 ?나!”

나는 1차로 문소리에 놀라고 2차로 삼촌의 목소리에 더 놀랐다. 나는 방바닥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다가 고개만 번쩍 돌려 삼촌을 올려다봤고, 삼촌이 방문을 닫을 때까지 그 자세 그대로 어버버는 커녕 입도 떼지 못했다.

삼촌이 사라지고 얼마 후, 거실이 약간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인가 하여 내복바람으로 나가보니 삼촌은 가죽점퍼를 척척 입고 있었다. 그러고는 대문 옆에 세워둔 (내 기억에는) 엄청나게 큰 바이크에 우두두두 시동을 걸더니 한참 후, 한 손에 스케치북을 달랑달랑 들고 돌아왔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내가 생각해도 저렇게까지 해서 찾을 만한 물건이 아닌데…. 나는 조그맣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언니 오빠들이 있는 방에 후다닥 들어왔다. 엄청난 이벤트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의 주인공이 돼본 적이 없어 뭘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나는 운전을 좋아하지만 여전히 운전이 무섭고, 나를 지켜줄 누군가가 조수석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차 안에는 늘 나뿐이다. 그래서 운전할 때면 내게 넘치도록 사랑을 퍼준 사람들의 말투로 얘기하는 건 아닌지. 나는 지금 100㎞를 혼자 달려 친구 집에 와 있다. 밤이 되니 내일 어떻게 돌아가나 미리 정신이 아득하지만… “가입시데이”를 중얼거리다 보면 어떻게든 도착해 있겠지. 마 내일도 함 달려보입시데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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