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조명탄_배태준 변호사] 사라진 박카스 형

입력 2023. 03. 13   15:42
업데이트 2023. 03. 13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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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태준 변호사
배태준 변호사


반수를 시작했다. 손재주가 없는 데다 피 보는 것도 싫은지라 의대는 적성에 안 맞았다. 학교 수업에 흥미가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교문 밖에서 보냈다. 하지만 나름 과 사람들과는 정이 들었었나 보다. 미안한 마음에 제대로 작별인사도 못 하고 학교를 떠났다. 

캠퍼스를 벗어나 재수학원 교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충격이었다. 서울 양대 학원 중 하나였지만 한 반의 정원이 90명에 이를 정도로 열악했다. 화장실이라도 가려면 앞뒤 사람이 의자와 책상을 빼 줘야 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요즘 말로 ‘현타’가 왔다. 수능을 다시 보는 것도 싫었고 적응도 자신이 없었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학원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요즘 뭐 하니?’라는 문자가 왔다. 삼수생 동기였던 박카스 형이었다. 어느 자리나 잘 어울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술의 신 바쿠스(Bacchus)의 이름을 딴 박카스라는 별명이 붙은 ‘인싸’ 형이었다. 깍쟁이였던 나와는 사뭇 달랐다. 정도 많았고 사람을 편하게 해 줬다. 지금 생각해 봐도 배울 점이 많다.

○○재수학원이라고 답을 하자 자기 집 근처라며 오늘 저녁에 시간이 있냐고 물었다. 나중에는 당시 유행하던 스타크래프트 덕분에 재수학원 친구들과 친해졌지만 그때만 해도 매일 혼자 점심과 저녁을 먹던 시절이었다. 온종일 말 한마디 안 하던 우울하던 시절 단비 같은 식사였다.

학교를 떠난 다음에도 종종 만나며 관계를 이어 갔다. 그사이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생이 됐고, 박카스 형은 계속 의대를 다니고 있었다. 본과 병원 근처에서 식사를 하던 날이었다. 형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웠다. 턱관절 근처가 너무 아파 잠을 잘 수 없다고 했다. 여러 병원과 한의원에서도 정확한 진단을 받지 못했다. 엄격한 본과 분위기 탓이었는지,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였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맥주를 한 잔 더 하기 위해 형의 자취방에 갔을 때 식탁 위에 알 수 없는 색들의 알약이 놓여 있었다.

결국 박카스 형은 군대를 갔다. 휴가를 나왔을 때는 조금은 나아진 표정이었다. 여전히 통증은 있지만 아무 생각이 안 들어 잠자기는 좀 낫다고 했다. 하지만 제대 후 학교로 돌아간 다음에는 다시 찡그린 표정이었다. 더 이상 수면제와 진통제도 잘 듣지 않는다고 했다. 닿지 않았을 것 같은 위로를 해 주고 돌아왔다. 내가 본 형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갔다는 풍문이 들렸다. 문자 답장도 조금씩 늦어지더니 전화번호가 바뀌었다.

얼마 전 예전 의대 동기들과 저녁을 함께했다. 사회인이 됐다고 인생의 고단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좌충우돌 시행착오의 스무 살을 추억했다. 자연히 학우들의 요즘 소식이 화두였다. 수업 시간에 딴짓을 하던 친구는 어엿한 교수가 돼 있고, 얌전하던 동기는 병원 홍보를 위해 블로그를 멋들어지게 꾸며 놓았다.

하지만 박카스 형의 소식은 아무도 몰랐다. 의학전문대학원으로 바뀌었다 다시 의대로 전환한 탓인지 학과 사무소에는 정보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개명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우리와 연을 억지로 끊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너무 아파 그렇게라도 극복해 보려는 안간힘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더 이상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나이가 드니 중화요리를 자주 먹지는 않게 된다. 하지만 20년이 넘게 지나도 박카스 형이 사 줬던 계란에 짜장을 올린 고슬고슬한 볶음밥이 떠오를 때가 있다. 힘든 시절에 내게 찾아와 준, 하지만 나는 구할 수 없었던 박카스 형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소식을 듣지는 못하더라도 어딘가에서 부디 잘 지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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