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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만 명 학살 막은 한 개의 수류탄

입력 2022. 10. 05   16:26
업데이트 2022. 10. 05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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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도살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작전-앤트로포이드 작전
유대인 절멸 계획 주도한 나치 고위급
체코 망명정부·영국 정보부, 제거 작전
출근길 첫 총격 실패 후 극적 차량 폭파
2차 대전 중 적 요인 암살 유일한 성공
쫓기던 저항군 투항 거부 장렬한 최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필자 제공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필자 제공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적국 요인을 암살하는 작전은 대부분 실패했다. 그중 유일하게 성공한 적국 요인 암살 작전은 바로 ‘프라하의 도살자’로 악명이 높았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1904~1942)를 제거하는 작전이었다. 나치 독일 초대 친위대 본부장과 비밀경찰(게슈타포) 국장을 맡았던 하이드리히는 유대인 절멸을 결정한 반제 회의를 주도한 인물이었고, 아돌프 히틀러의 후계자로 평가받았던 나치의 거물이었다.

대부분 나치 거물들이 그렇듯 하이드리히 역시 보잘것없는 경력을 지닌 자였다. 1904년 독일 동부 할레안데어잘레에서 태어난 하이드리히는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낸 내성적인 인물이었다. 음악가인 부모님 덕분에 수준 높은 음악적 소양을 지녔지만, 학창시절 내내 하이드리히는 유대인으로 취급당하면서 따돌림을 당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한 그는 소위로 임관한 후 약혼녀 외에 다른 여자와 내연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궁지에 몰렸다. 그와 내연관계를 맺은 여자의 아버지가 독일 해군 총사령관 레더 제독의 친구였던 탓에 하이드리히는 불명예 제대라는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상심한 하이드리히는 1931년 나치당의 돌격대에 들어가 활동했고,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의 눈에 들어 중용되었다. 힘러는 하이드리히의 효율적이고 비상한 두뇌를 알아보았다. 유대인 격리, 반대정당 탄압, 정치 테러 등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인 하이드리히는 곧 친위대 보안국을 책임지는 위치에 올랐다.

몰락한 귀족 출신인 그의 아내 리나는 철저한 나치당 신봉자였다. 자신의 권력욕을 남편에게 투영한 그녀는 하이드리히의 잔혹한 만행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하이드리히는 악명 높은 토벌부대 ‘아인자츠그루펜’을 조직하여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학살에 앞장섰다. 그는 공군 조종사로 참전하여 수십 회의 폭격 임무를 직접 수행하기도 했다. 1941년 말, 체코 총독에 임명된 하이드리히는 체코 수도 프라하를 ‘유대인 없는 도시’로 명명했다.

그는 무기공장에서 일하는 체코인들의 월급을 인상하는 방식으로 체코인들을 회유하여 유대인들을 밀고하도록 했다. 하이드리히가 체코 총독으로 있는 동안 체코의 무기생산량은 비약적으로 상승했고, 그는 곧 히틀러의 신임을 얻었다. 그리고 나치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과 친위대장 힘러로부터 유대인 문제 최종 해결책을 지시받은 그는 1942년 1월 반제 회의를 주최하여 유대인들을 유럽 각지의 수용소에 보내 학살하는 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영국으로 망명한 체코 망명정부와 영국 정보부는 하이드리히의 만행을 주시했다. 영국 정보부는 망명정부의 체코 군인들을 훈련시키면서 하이드리히를 암살하는 ‘앤트로포이드 작전’을 추진했다. 1942년 5월 초, 영국군 특수부대로부터 암살에 필요한 훈련을 받은 체코 망명정부 소속 요제프 갑치크와 얀 쿠비시 등이 체코에 잠입했다.

그들은 경호대를 동원하지 않고 자동차로 출퇴근하는 하이드리히의 동선을 파악하고, 치밀한 작전을 짰다. 이들과 접선한 체코 레지스탕스 조직은 작전에 회의적이었다. 하이드리히를 암살하면 독일군이 프라하 시민들을 학살할 것은 자명했다. 더구나 하이드리히의 정책에 호응하는 밀고자들에 의해 레지스탕스 조직 역시 분쇄될 가능성이 컸다.

체코 망명정부, 영국군 특수부대, 체코 현지 레지스탕스 조직의 의견 충돌로 작전 실행은 점점 늦춰졌다. 내부 갈등이 고조되던 중 체코 레지스탕스 지도자 모라베크는 위험을 무릅쓰고 작전에 협조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모라베크는 독일군에 발각돼 쫓기다가 자살하고 만다. 이제 암살 작전이 성공해도 두 요원은 퇴로를 확보할 수 없었다.

영국군은 다급히 작전 취소 명령을 하달했지만, 요제프 갑치크와 얀 쿠비시는 거부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암살된 나치 요인들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저항조직 동료들에게 역설하면서 기어이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

1942년 5월 27일, 하이드리히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메르세데스 벤츠 자동차를 타고 출근했다. 커브 길에서 속도를 줄인 자동차를 향해 요제프 갑치크가 스텐 기관총으로 사격했지만,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다. 다급하게 재장전을 시도하다가 요제프 갑치크는 도주했고, 독일군 운전병이 권총을 쏘면서 그를 추격했다. 하이드리히는 자동차에서 내려 서 있는 상태였다.

그때 얀 쿠비시 중사가 던진 수류탄이 자동차 아래서 폭발했다. 폭발한 자동차의 파편에 맞은 하이드리히는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베를린에서 급파된 외과의들이 그를 치료했지만, 상처 부위 염증이 가라앉지 않았고, 하이드리히는 결국 폐렴으로 사망했다.

사망하기 직전 하이드리히가 끝까지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은 ‘유대인 최종해결책’이 담긴 서류였다. 하이드리히의 사망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격노했다. 곧 프라하에는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독일군의 잔혹한 보복이 이어졌다. 요제프 갑치크와 얀 쿠비시가 낙하산을 타고 착륙했던 마을은 흔적도 없이 소거되었고, 주민들은 모두 사살되었다. 프라하에서만 1500명이 넘는 시민들이 동조자로 몰려 사살되었고, 3000명이 넘는 유대인이 절멸수용소로 보내졌다.

프라하 시내의 성당에 은신한 요제프 갑치크와 얀 쿠비시는 동료의 밀고로 발각되고 말았다. 성당을 겹겹이 포위한 독일군이 투항을 권고했으나 그들은 거부했다.

체코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나서 독일군과 총격전을 벌이는 사이에 요제프 갑치크와 얀 쿠비시는 성당 지하로 대피했다, 성당 1층에서 싸우던 동료들은 모두 사살되었다.

지하 통로를 발견한 독일군은 살수차를 동원하여 지하로 물을 퍼부었다. 두 사람은 곡괭이를 들고 필사적으로 벽을 부수었지만 소용없었다. 물은 금방 목까지 차올랐다.

요제프 갑치크와 얀 쿠비시는 항복을 거부하고 서로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발사했다.

영화 ‘철의 심장을 가진 사나이’의 한 장면.  필자 제공
영화 ‘철의 심장을 가진 사나이’의 한 장면. 필자 제공

영화 ‘새벽의 7인’에서 항복을 거부하고 서로의 머리에 총을 겨눈 요제프 갑치크와 얀 쿠비시.  필자 제공
영화 ‘새벽의 7인’에서 항복을 거부하고 서로의 머리에 총을 겨눈 요제프 갑치크와 얀 쿠비시. 필자 제공

그들의 투쟁은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다. 1975년 체코와 미국의 합작으로 루이스 길버트 감독의 영화 ‘새벽의 7인’이 제작되었고, 2016년에는 영화 ‘앤트로포이드’와 ‘철의 심장을 가진 사나이’가 제작되었다. 특히 ‘철의 심장을 가진 사나이’는 체코 저항군이 아닌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일생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세드릭 히메네즈 감독은 이 영화에서 죽는 순간까지 유대인 절멸에 집착하면서 나치즘을 신봉한 하이드리히의 광기가 형성되는 과정을 응시했다.

만약 그가 살았더라면, 그의 계획대로 1200만 명이 넘는 유대인을 제거하는 계획이 효율적으로 실행되었을 것이다.

체코인들은 그를 암살하여 전대미문의 학살에 제동을 걸었다. 프라하의 성 키릴과 성 메토디우스 대성당에는 지금도 그들의 저항 정신을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


필자 이정현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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