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세 하급장교 함경도 지역 의병 규합
장덕산 전투서 조선 육군 첫 선공 승리
적 보급 끊고 기마병 기습으로 전멸시켜
간신 농간에 전공 뺏기고 참전 발 묶여
이괄의 난 연루 누명 쓰고 억울한 옥사
함경도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소외된 지역이었다. 세종 때 4군과 6진을 세우면서 함경도는 조선 영토가 되었다. 조선 정부는 소작농, 화전민, 죄수 등을 이주시켜 함경도를 개척하도록 했다. 함경도 지역에서는 여진족과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험한 산이 많은 탓에 농사를 짓기도 쉽지 않았다. 이주민들은 험한 여건을 극복하면서 정착했고, 국경 유지와 농지 개척의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함경도 이주민들은 줄곧 천대와 멸시를 받았다. 함경도에서는 이징옥의 난(1453), 이시애의 난(1467) 등 반란이 일어났고 그때마다 차별은 더욱 심해졌다. 천민과 죄수들이 사는 반역의 땅, 이것이 함경도에 찍힌 낙인이었다.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함경도는 위기에 몰렸다.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 제2군이 북상하자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이혼은 북쪽으로 이동해 국경 지대를 방어하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한극함의 병력과 합류했다. 한극함이 이끄는 병력은 오랜 세월 여진족과 전투를 겪은 조선 최정예 기마병이었다. 1592년 7월 17일, 함경도 기마병들은 북상하는 일본군과 함경북도 단천 인근 해정창에서 충돌했다. 전투 초기 조선군은 기마병의 빠른 돌격으로 기선을 제압했다. 기마병의 빠른 속도는 조총의 연사 속도를 압도했다.
그러나 전열을 정비한 일본군이 방진을 구성하여 일제 사격을 가하자 조선 기마대는 산악 지역으로 물러났다. 이것은 큰 실수였다. 산악 지역에서 기마병의 이동은 극히 어려웠다. 야간에 일본군이 숙영지를 기습하자 당황한 조선 기마병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지휘관 한극함은 여진 지역까지 도피했다가 나중에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해정창 전투 패배로 관군의 통제력이 약해지자 함경도 곳곳에서 관리들의 투항과 이탈이 벌어졌다. 함경북도 경성의 토호 국세필은 일본군에 순응을 선언하고 나섰다. 6진을 방어하던 국경인도 반란을 일으켰고, 당시 함경도 회령에 피신한 왕세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체포하여 일본군에 넘겼다. 조선 관료들의 이런 순응은 가토 기요마사도 놀랄 정도였다.
일본군은 순왜(일본에 협력한 조선인)들을 앞세워 두만강 건너 여진족까지 공격했다. 함경도 북쪽 국경에서는 여진족, 일본군, 조선인들이 뒤섞인 난전이 벌어졌다. 이 시기에 28세에 불과한 정6품 하급장교 정문부(1565~1624)가 함경도 지역 의병들을 규합하고 나섰다. 일본군과 순왜들의 약탈에 분노한 유생, 농민들이 의병에 합류했다.
정문부는 순왜 국세필을 설득하여 함경북도 경성에 무혈 입성했다. 의병에 합류하면 죄를 씻을 기회를 주겠다는 정문부의 약속으로 많은 순왜들이 마음을 돌렸고, 흩어졌던 관군들도 합류했다. 정문부가 이끄는 의병들은 6진 지역을 회복하고 반란 주동자 국경인을 처단했다. 함경북도를 평정한 정문부는 남쪽으로 진격했다.
1592년 10월 30일, 장평 인근에서 1000여 명의 일본군이 노략질을 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정문부는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정문부는 해정창 전투의 교훈을 살려 기마병을 여러 방향에서 돌격시켜 일본군의 조총 사격을 분산시켰다. 기마병의 파상 공세에 밀린 일본군은 장덕산으로 도주했다. 장덕산에 갇힌 일본군들은 극심한 추위에 시달렸다. 따뜻한 규수 지방 출신 일본군들은 함경도 산악의 추위를 견디지 못했다. 마침내 퇴로가 없는 좁은 계곡에 몰린 일본군은 전멸했다.
정문부는 일본군 머리와 귀 800개를 베어 조정에 보내 승리를 알렸다. 장덕산 전투는 조선군이 육지에서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승리한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다.
겨울이 되자 추위에 약한 일본군은 수성에 들어갔다. 정문부는 길주성의 일본군을 포위하여 보급을 끊는 고사(枯死) 작전을 펼쳤다. 땔감과 식량이 떨어진 일본군은 성 밖으로 나올 때마다 도륙당했다. 1593년 1월, 길주에 일본군을 가둔 채로 정문부는 단천군수 강찬(1557~1603)의 병력과 합류하여 일본군의 보급기지 단천을 공격했다.
정문부의 전략은 다시 적중했다. 주력군을 매복시키고 단천성 공격에 소수의 병력만 내세우자 일본군 200여 명이 성문을 열고 몰려나왔다. 정문부는 기마병으로 기습하여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기마병을 적시에 배치하여 보병을 기습하는 정문부의 전술에 일본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1593년 1월 9일,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점령하고 한양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하자 함경도의 일본군은 후방에 고립될 위기에 빠졌다. 함경도에 주둔한 일본군 부대에 공포가 급격히 확산하자 가토 기요마사는 전면 퇴각을 결정했다. 일본군은 길주성에 고립된 병력을 구출하기 위해 3000의 병력을 급파했다.
전황을 분석한 정문부는 함경도의 일본군이 곧 퇴각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길주로 접근하는 일본의 구원부대는 곳곳에서 기병의 기습에 시달렸고, 구원부대와 합류하려고 길주성을 탈출한 일본군 역시 매복 공격으로 대다수가 사살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진과는 달리 별다른 손실 없이 함경도에 진출했던 가토 기요마사는 정문부가 이끄는 의병의 공격으로 병력 절반을 잃고 황급히 퇴각했다.
함경도를 일거에 탈환한 일련의 전투들은 ‘북관대첩’으로 명명되었다. 행주산성, 진주성 전투 등 임진왜란 때 조선 육군이 승리한 전투는 대부분 수성(守城)전이었으나 정문부의 승리는 능숙한 기병 운용과 매복 전술로 거둔 기동전이었기에 더욱 큰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정문부의 전공은 간신들의 농간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함경도 순찰사 윤탁연(1538~1594)은 정문부가 참살한 일본군의 목을 가로채어 자신의 전공으로 보고했다.
윤탁연의 뇌물을 받은 조정의 관료들은 윤탁연의 거짓 보고를 묵인했다. 정문부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전공을 내세우거나 항의하지 않았다.
정문부는 삼남(전라도·충청도·경상도) 전선에 파견되길 원했다. 그러나 정문부가 더 큰 전공을 세울 것을 질시한 윤탁연과 간신들의 방해로 정문부는 함경도 길주와 영흥 목사로 임명되어 함경도에 발이 묶였다. 만약 정문부가 계속 활약했더라면 임진왜란의 전황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의병들의 희생으로 위기에서 벗어났으나 조선 정부는 의병장들을 외면했다. 백성을 버리고 피신하여 민심을 잃은 선조는 의병장들의 명망이 높아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왜란 이후 정문부는 이괄의 난(1624)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옥중에서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다.
훗날 러·일전쟁 중 일본은 정문부의 활약이 상세히 기록된 ‘북관대첩비’를 철거하여 활자를 훼손한 다음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했다. 2005년, 남북한 정부가 공동으로 일본 정부에 요청하여 100년 만에 북관대첩비를 돌려받았다.
필자 이정현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28세 하급장교 함경도 지역 의병 규합
장덕산 전투서 조선 육군 첫 선공 승리
적 보급 끊고 기마병 기습으로 전멸시켜
간신 농간에 전공 뺏기고 참전 발 묶여
이괄의 난 연루 누명 쓰고 억울한 옥사
함경도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소외된 지역이었다. 세종 때 4군과 6진을 세우면서 함경도는 조선 영토가 되었다. 조선 정부는 소작농, 화전민, 죄수 등을 이주시켜 함경도를 개척하도록 했다. 함경도 지역에서는 여진족과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험한 산이 많은 탓에 농사를 짓기도 쉽지 않았다. 이주민들은 험한 여건을 극복하면서 정착했고, 국경 유지와 농지 개척의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함경도 이주민들은 줄곧 천대와 멸시를 받았다. 함경도에서는 이징옥의 난(1453), 이시애의 난(1467) 등 반란이 일어났고 그때마다 차별은 더욱 심해졌다. 천민과 죄수들이 사는 반역의 땅, 이것이 함경도에 찍힌 낙인이었다.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함경도는 위기에 몰렸다.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 제2군이 북상하자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이혼은 북쪽으로 이동해 국경 지대를 방어하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한극함의 병력과 합류했다. 한극함이 이끄는 병력은 오랜 세월 여진족과 전투를 겪은 조선 최정예 기마병이었다. 1592년 7월 17일, 함경도 기마병들은 북상하는 일본군과 함경북도 단천 인근 해정창에서 충돌했다. 전투 초기 조선군은 기마병의 빠른 돌격으로 기선을 제압했다. 기마병의 빠른 속도는 조총의 연사 속도를 압도했다.
그러나 전열을 정비한 일본군이 방진을 구성하여 일제 사격을 가하자 조선 기마대는 산악 지역으로 물러났다. 이것은 큰 실수였다. 산악 지역에서 기마병의 이동은 극히 어려웠다. 야간에 일본군이 숙영지를 기습하자 당황한 조선 기마병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지휘관 한극함은 여진 지역까지 도피했다가 나중에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해정창 전투 패배로 관군의 통제력이 약해지자 함경도 곳곳에서 관리들의 투항과 이탈이 벌어졌다. 함경북도 경성의 토호 국세필은 일본군에 순응을 선언하고 나섰다. 6진을 방어하던 국경인도 반란을 일으켰고, 당시 함경도 회령에 피신한 왕세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체포하여 일본군에 넘겼다. 조선 관료들의 이런 순응은 가토 기요마사도 놀랄 정도였다.
일본군은 순왜(일본에 협력한 조선인)들을 앞세워 두만강 건너 여진족까지 공격했다. 함경도 북쪽 국경에서는 여진족, 일본군, 조선인들이 뒤섞인 난전이 벌어졌다. 이 시기에 28세에 불과한 정6품 하급장교 정문부(1565~1624)가 함경도 지역 의병들을 규합하고 나섰다. 일본군과 순왜들의 약탈에 분노한 유생, 농민들이 의병에 합류했다.
정문부는 순왜 국세필을 설득하여 함경북도 경성에 무혈 입성했다. 의병에 합류하면 죄를 씻을 기회를 주겠다는 정문부의 약속으로 많은 순왜들이 마음을 돌렸고, 흩어졌던 관군들도 합류했다. 정문부가 이끄는 의병들은 6진 지역을 회복하고 반란 주동자 국경인을 처단했다. 함경북도를 평정한 정문부는 남쪽으로 진격했다.
1592년 10월 30일, 장평 인근에서 1000여 명의 일본군이 노략질을 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정문부는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정문부는 해정창 전투의 교훈을 살려 기마병을 여러 방향에서 돌격시켜 일본군의 조총 사격을 분산시켰다. 기마병의 파상 공세에 밀린 일본군은 장덕산으로 도주했다. 장덕산에 갇힌 일본군들은 극심한 추위에 시달렸다. 따뜻한 규수 지방 출신 일본군들은 함경도 산악의 추위를 견디지 못했다. 마침내 퇴로가 없는 좁은 계곡에 몰린 일본군은 전멸했다.
정문부는 일본군 머리와 귀 800개를 베어 조정에 보내 승리를 알렸다. 장덕산 전투는 조선군이 육지에서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승리한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다.
겨울이 되자 추위에 약한 일본군은 수성에 들어갔다. 정문부는 길주성의 일본군을 포위하여 보급을 끊는 고사(枯死) 작전을 펼쳤다. 땔감과 식량이 떨어진 일본군은 성 밖으로 나올 때마다 도륙당했다. 1593년 1월, 길주에 일본군을 가둔 채로 정문부는 단천군수 강찬(1557~1603)의 병력과 합류하여 일본군의 보급기지 단천을 공격했다.
정문부의 전략은 다시 적중했다. 주력군을 매복시키고 단천성 공격에 소수의 병력만 내세우자 일본군 200여 명이 성문을 열고 몰려나왔다. 정문부는 기마병으로 기습하여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기마병을 적시에 배치하여 보병을 기습하는 정문부의 전술에 일본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1593년 1월 9일,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점령하고 한양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하자 함경도의 일본군은 후방에 고립될 위기에 빠졌다. 함경도에 주둔한 일본군 부대에 공포가 급격히 확산하자 가토 기요마사는 전면 퇴각을 결정했다. 일본군은 길주성에 고립된 병력을 구출하기 위해 3000의 병력을 급파했다.
전황을 분석한 정문부는 함경도의 일본군이 곧 퇴각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길주로 접근하는 일본의 구원부대는 곳곳에서 기병의 기습에 시달렸고, 구원부대와 합류하려고 길주성을 탈출한 일본군 역시 매복 공격으로 대다수가 사살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진과는 달리 별다른 손실 없이 함경도에 진출했던 가토 기요마사는 정문부가 이끄는 의병의 공격으로 병력 절반을 잃고 황급히 퇴각했다.
함경도를 일거에 탈환한 일련의 전투들은 ‘북관대첩’으로 명명되었다. 행주산성, 진주성 전투 등 임진왜란 때 조선 육군이 승리한 전투는 대부분 수성(守城)전이었으나 정문부의 승리는 능숙한 기병 운용과 매복 전술로 거둔 기동전이었기에 더욱 큰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정문부의 전공은 간신들의 농간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함경도 순찰사 윤탁연(1538~1594)은 정문부가 참살한 일본군의 목을 가로채어 자신의 전공으로 보고했다.
윤탁연의 뇌물을 받은 조정의 관료들은 윤탁연의 거짓 보고를 묵인했다. 정문부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전공을 내세우거나 항의하지 않았다.
정문부는 삼남(전라도·충청도·경상도) 전선에 파견되길 원했다. 그러나 정문부가 더 큰 전공을 세울 것을 질시한 윤탁연과 간신들의 방해로 정문부는 함경도 길주와 영흥 목사로 임명되어 함경도에 발이 묶였다. 만약 정문부가 계속 활약했더라면 임진왜란의 전황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의병들의 희생으로 위기에서 벗어났으나 조선 정부는 의병장들을 외면했다. 백성을 버리고 피신하여 민심을 잃은 선조는 의병장들의 명망이 높아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왜란 이후 정문부는 이괄의 난(1624)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옥중에서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다.
훗날 러·일전쟁 중 일본은 정문부의 활약이 상세히 기록된 ‘북관대첩비’를 철거하여 활자를 훼손한 다음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했다. 2005년, 남북한 정부가 공동으로 일본 정부에 요청하여 100년 만에 북관대첩비를 돌려받았다.
필자 이정현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