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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장병 취·창업 도전기 인터뷰] 홍종석(예비역 해병중위) 더스코어학원장

이원준

입력 2022. 08. 12   16:41
업데이트 2022. 08. 15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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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낙방·사업 실패… 해병정신으로 다시 일어섰죠”

좋은 일(Job)이 생길 거야

전역장병 취·창업 도전기
47 홍종석(예비역 해병중위) 더스코어학원장

 
절망의 순간, 가장 보람찼던 기억 떠올려
과외 알바 경험 바탕으로 작은 교습소 시작
입시학원 2곳·프리미엄 독서실로 키워내


전기공사 등 궂은일 도와준 전우들 ‘큰 힘’
12년 전 썼던 팔각모, 학원 한쪽에 자리
“해병대서 배운 교훈·감사함 잊지 않을 것”

 

홍종석 더스코어학원장이 해병대 팔각모를 품에 안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홍 원장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군 생활을 통해 깨달았다. 지금의 성취도 강사님과 직원의 덕”이라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홍종석 더스코어학원장이 해병대 팔각모를 품에 안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홍 원장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군 생활을 통해 깨달았다. 지금의 성취도 강사님과 직원의 덕”이라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전역 후 두 차례 고시 낙방에 사업 실패까지 했다. 빚이 수억 원으로 불어나 있었고, 추운 겨울 잠잘 곳이 없어 친구의 신혼집에 얹혀살기도 했다.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경기도 구리시 일대에서 더스코어학원을 운영 중인 홍종석 학원장의 지난 이야기다. 희망의 불빛이 보이지 않던 시기, 홍 원장의 마음을 다잡아 준 것은 ‘해병대 장교’라는 자부심이었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생각에 그는 학원강사에 도전했다.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 20대 때 과외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에게 가장 보람찼고 재미있는 경험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학생들을 지도해 보니 적성에 딱 맞았다. 천직을 발견했다고 생각한 그는 곧바로 학원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심, 빚을 내 사업을 시작했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는 그야말로 배수의 진이었다. 해병정신으로 역경을 이겨내고 현재 입시학원과 독서실 여러 곳을 운영 중인 그를 인터뷰했다. 글·사진=이원준 기자


해병대 팔각모 12년째 고이 보관

더스코어학원 원장실에는 ‘해병대 팔각모’가 서랍장 한쪽에 놓여 있었다. 인터뷰 때문에 가져온 것이냐 물으니 홍 원장은 웃으며 “그런 건 아니다”고 답했다.

“제가 12년 전 전역 신고할 때 실제로 착용했던 모자입니다. 평소 강사님들이나 학생들한테 해병대 이야기는 안 하는 편인데, 원장실에 놓인 팔각모를 보고 다들 제가 해병대 출신인 걸 알더군요. 제 머리가 짧기도 하고요. 짓궂은 강사분은 학생들에게 ‘원장님 해병대니까 조심하라’고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웃음).”

사무실에 팔각모를 놔 둘 정도로 해병대를 향한 그의 애정은 남다르다. 홍 원장은 해병대2사단 포병대대에서 통신장교로 임무를 수행했다. 그가 군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임관 후 첫 포 사격훈련. 낯선 임무 탓에 가시밭길을 걷는 듯했다고 회상했다.

“너무 힘들어서 남몰래 숨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갓 입대한 이병이 제게 ‘통신관님! 힘내십시오’라며 주먹을 불끈 쥐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세상에는 나를 생각해 주고 도와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나도 잘할 수 있고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겼고, 이를 통해 자신감을 갖게 됐습니다.”


낭떠러지 끝에서 새롭게 도전

홍 원장은 2010년 해병중위로 당당히 전역했다. 해병대 장교라는 자부심으로 세상 어떤 일이든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동계훈련을 방불케 하는 혹독한 시련이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습니다. 고시에 도전했지만 두 차례나 합격선 문턱에서 좌절을 맛봐야 했고, 연이은 사업 실패로 수억 원의 빚을 지게 됐습니다. 늦은 나이에 취업마저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게 가장 고통스러웠죠. 당시 너무나도 간절한 마음에 매일 새벽예배에 나갔습니다. ‘돈은 못 벌어도 좋으니 제발 일 때문에 바쁜 삶을 살게 해 주세요’라고 울며 기도했죠.”

위기의 순간, 그는 자만심과 교만함을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게 출발점이었다. 그때 문득 대학생 시절 과외를 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떡집, 세차장, 텔레마케팅, 건설현장 등 다양한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과외를 했던 기억이 가장 보람찼고 재미있었습니다. 시험에서 20점을 맞았던 학생이었는데 과외 후 성적이 수직상승하면서 이화여대에 진학했었죠. 학생·학부모 만족도가 높았고, 입시 결과도 좋았으니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에 주저 없이 강사로 첫발을 디뎠습니다.”

학원강사 일은 천직처럼 느껴졌다. 탄력을 받은 그는 26㎡(약 8평) 남짓한 공간을 임대해 교습소를 차렸다. 더스코어학원의 시작이었다.

“당시 고시원 생활을 하던 제게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35만 원으로 시작한 교습소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간절함 그 자체였습니다. 온갖 걱정에 밤잠 설치던 기억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고난을 이겨내는 데는 해병정신도 큰 도움이 됐다. 군 시절 그랬던 것처럼 홍 원장은 목표 달성에 몰두했다. 그가 교습소를 연다는 소식을 들은 전우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군 시절 소대원 한 명이 경남 김해에서 일주일 휴가를 내고 달려와 준 적이 있습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을 알아서였는지 전기공사, 통신선로공사, 전단 배포, 청소 등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해 줬습니다. 저에게는 정말 큰 힘이 됐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간절한 노력, 그리고 주위의 도움으로 홍 원장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교습소가 입소문을 타며 3개월 만에 수강 마감이 된 것. 덕분에 학원 운영이 빠르게 정상화될 수 있었고, 나중에는 규모를 키워 더 넓은 공간으로 이사했다.

“입시 결과로 성과를 증명하며 ‘구리시 영어는 더스코어’라는 말이 학생·학부모 사이에서 돌았습니다. 학원 수강생 모두 강의 후 나머지 시간에 전담 조교의 밀착관리를 받으며 실력을 탄탄하게 다집니다. 이러한 교육시스템으로 현재 구리시에서 330㎡(약 100평)가 넘는 입시학원 2곳과 프리미엄 독서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홍 원장은 어려운 시절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앞으로 누군가를 도우며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혼자서는 해낼 수 없다는 것, 그가 해병대에서 배운 교훈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군 생활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학원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힘든 시절 저를 믿고 함께해 준 모든 강사님과 직원의 덕이라고 생각하며 항상 감사함을 잊지 않고 있죠. 늦은 나이에 제 적성을 알게 됐습니다. 앞으로 목표는 내가 경험한 학원 운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학원장을 육성하고 싶습니다.”


이원준 기자 < wonjun44@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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