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역사에서 만나는 전쟁이야기 - ‘근대 화학의 아버지’ 라부아지에 원소-화합물 구성으로 물질 설명…근대 화학체계 기틀 잡아
1789년 ‘화학원론’ 통해 주요 원소 구분하는 분류체계 정립
1775년부터 1791년까지 프랑스군 화약 성능 개량·보급 책임자
부인 마리 앤 폴즈, 평생 모든 연구 함께하며 체계적·분석적 지원
고전주의 미술의 대표적인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라부아지에 부부의 초상.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누구나 중·고교 시절, 원소 이름과 함께 주기율표를 고생스럽게 외워야 했던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주기율표는 1869년 러시아의 화학자 멘델레예프가 처음 선보였는데, 이 표는 그에 앞서 물질이론을 설명하고자 했던 여러 화학자가 축적한 성과의 총합으로 볼 수 있다.
1차적으로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각 원소의 주기성을 질량 차이로 구분하고, 물질의 원소 기본단위를 원자 입자로 설명한 영국 화학자 돌턴의 ‘원자론’(1809)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다. 돌턴 역시 산소를 비롯해 33종의 주요 물질 원소의 존재와 성격을 최초로 규명한 라부아지에 업적의 후속 연구로 원자론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결국 자연세계의 물질과 물질현상을 원소와 화합물의 구성으로 설명하면서 근대 화학이론을 체계화한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1743~1794)가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게 됐다.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법률가 가문 출신인 라부아지에는 법학을 전공했으나 물질과 물질현상을 다루는 화학에 매료되면서 18세기 화학혁명의 주역이 됐다. 그가 연구를 시작할 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이나 파라셀수스의 3원리설을 거쳐 플로지스톤 이론으로 모든 물질의 본질과 현상을 설명하던 시대였다. 화학자들은 실험을 바탕으로 물질현상을 다루면서도 여전히 정성적 설명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연소현상을 포함해 화학반응을 모든 물질에 빠짐없이 들어가 있는 ‘플로지스톤’ 입자의 결합과 분리로 설명했다.
이러한 플로지스톤 이론을 폐기하고 중세적 물질론에서 탈피해 근대 화학의 체계를 정립한 주인공이 바로 라부아지에였다. 그는 엄청난 성실성과 열정으로 고된 실험과 연구를 지속했는데 연소현상에 대한 끈질긴 실험과 추론 과정을 거듭하면서 공기 중 산소 원소의 존재를 확인, 플로지스톤 이론에 기대지 않는 혁신적 이론체계를 제시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산소와 질소, 탄소의 이름도 그가 붙였다. 규칙과 원칙을 적용함으로써 원소뿐 아니라 원소들이 결합한 화합물에도 체계적으로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명명법’이 탄생했다. 그와 함께 규칙성에 기반을 둬 주요 원소들을 특성에 따라 구분하고 그룹화하는 ‘분류체계’ 역시 라부아지에가 1789년 출간한 『화학원론』에 소개했다.
이뿐만 아니라 라부아지에는 오늘날 너무도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질량보존의 법칙’, 즉 화학반응 전후 물질의 무게 합이 동일하다는 실험 결과를 보편법칙화함으로써 화학이 정성적 물질론에서 탈피해 정량적·계량적 토대를 갖춘 근대 과학의 당당한 일원으로 탈바꿈하도록 이끌었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18세기 전반, 갈릴레오와 뉴턴의 과학혁명을 거쳐 지상의 물체운동과 함께 하늘의 행성 등 천체운동이 수식화된 역학과 물리학의 동일 법칙으로 설명되는 근대 천문학과 물리학이 완성된 것처럼 화학도 라부아지에에 이르러 근대 과학의 일원으로 대접받게 됐다. 겉으로는 도저히 수학적 법칙으로 계량화·단순화할 수 없을 것 같은 세상의 수많은 물질과 물질현상들을 단 몇 종류의 원소와 원자, 그리고 원소 간 화합물의 결합과 분리의 반응 과정으로 체계적·정량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근대 화학체계의 기틀을 라부아지에가 잡은 것이다.
한편 과학자가 전문직업인으로 변모하게 되는 과도기의 상징적 인물이 바로 라부아지에이기도 하다. 그는 프랑스혁명을 전후한 근대 국가 성립기에 국가의 군사적 임무를 훌륭히 수행함으로써 과학자가 전문직업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770년대 초반, 프랑스 군대는 머스킷 총과 화포 등 최고 수준의 신무기체계를 갖추고도 화력의 관건인 화약 품질이 떨어져 고전하고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어려운 국고 사정에도 불구하고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의 독립전쟁에 엄청난 재정·군사지원을 강행했는데, 그 와중에 재무장관 튀르고가 화약 성능 개량의 막중한 임무를 라부아지에에게 맡겼다. 이를 계기로 라부아지에는 1775년부터 1791년까지 프랑스군 전체의 화약 개량뿐 아니라 병기창 운영과 보급행정의 총괄책임자가 됐다.
탁월한 능력으로 화약 성능과 화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던 그의 업적 덕분에 혁명기부터 나폴레옹 시대 들어 프랑스는 전 유럽을 지배하는 군사력의 토대를 다질 수 있었다.
당대 과학자들의 실력을 신뢰해 국가와 군대 경영에 활용하고자 했던 튀르고는 파리에만 4곳의 병기창을 만들면서 무기를 개발하고 개량하는 실험실을 같이 설치했다.
그중 매우 훌륭한 실험설비와 보조인력을 쓸 수 있는 한 곳을 전적으로 라부아지에에게 맡겼고 그는 이 병기창의 사택과 실험실에서 안정적으로 연구와 업무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는 정부가 과학자들에게 독립된 연구공간과 기회를 제공하면서 국가 경영과 군사적 목적의 연구를 맡긴 최초이자 대표적 사례로 볼 수 있다.
이제 과학자들은 개인적 취미가 아니라 국가 경영과 군사 영역에서 공적 임무를 수행하는 전문직업인으로 인정받게 됐고 국가 권력도 과학자들을 체계적·제도적으로 동원함으로써 국가 운영과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관리·운영하는 시스템을 얻게 됐다.
그러나 여기서 유념할 점이 있다. 라부아지에가 당시 그의 산소이론을 위시한 화학적 연구 결과를 그대로 적용해 화약 품질과 무기 개량의 성과를 얻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다음 회차에 다룰 몽주나 라플라스, 라그랑주 등 당대 수학자와 과학자들 역시 그들의 실력과 성과가 수학·물리학 이론을 군수품 개발과 개량에 바로 적용한 결과라기보다 연구 수행 과정에서 체득한 계량적이고 합리적이며 체계적인 실험방법이나 사고방식, 과학적 태도가 바탕이 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당시 무기체계의 수준은 과학기술적 연구개발의 결과라기보다는 수많은 시도와 경험, 그리고 시험과 실험의 반복에 의해 누적적으로 발전되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고 풀이할 수 있다.
생폴항구에서 화약제조법에 대해 설명하는 라부아지에. 필자 제공
라부아지에는 초인적 열정과 성실성으로 실험실의 고된 노동과 연구를 감내하면서 연구에 매진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가 ‘근대 화학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혼자만의 업적이라기보다 그의 옆에서 실험과 기록, 집필에 이르기까지 평생 모든 연구를 함께했던 부인 마리 앤 폴즈의 도움에 크게 힘입었다는 점에 과학사가들 간 이견은 없다.
과학의 역사에서 여성 과학자들의 업적이 제대로 조명받는 일 자체가 매우 드문 편이다. 그동안 마리 앤 폴즈는 라부아지에의 동료 과학자가 아니라 남편의 충실한 조수로서 주로 기술됐었다. 그러나 최근 라부아지에의 실험과 연구 성과는 부인의 체계적이고 계획적이며 분석적인 지원과 협업 없이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그녀 또한 스스로 살롱을 운영하면서 당시 계몽철학자를 위시해 프랑스를 대표하는 과학자·수학자들의 학문적 교류의 중심이 됐던 훌륭한 과학자이자 계몽사상가였다.
한편 라부아지에는 연구자금을 안정적으로 조달하기 위해 일찍이 징세청부인 권리를 샀는데, 이를 통해 실제 상당한 재정적 도움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면서 이 징세청부인 권리가 큰 문제가 됐다. 그간 중앙정부 대리로 징수업무를 해 돈을 챙기던 징세청부업자들이 구체제인 왕정을 대리해 민중을 핍박하는 반혁명집단으로 몰린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혁명을 지지했던 계몽사상가였음에도 불구하고 1794년 로베스피에르와 마라 등 급진파에 의해 화학자가 아닌 징세청부인으로 체포돼 단두대에서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당시 수많은 수학자와 과학자들이 화약과 무기체계를 개량·발전시켰던 라부아지에의 군사적 업적을 들어 구명운동에 적극 나섰다. 그러나 징세청부업자로서뿐만 아니라 엘리트 과학자집단을 향한 평민 장인과 수공업자들의 민중적 반감을 이겨낼 수 없었던 라부아지에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당시 프랑스를 대표하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라그랑주는 ‘라부아지에와 같은 천재의 머리를 얻는 데 100년이라는 세월도 부족하지만 불과 몇 초 만에 그 머리를 자르는’ 현실을 통탄했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결국 오늘날의 역사는 라부아지에를 프랑스군을 강군으로 만든 애국적이고 능력 있는 군사과학기술자이자 행정가, 그리고 근대 화학을 탄생시킨 위대한 화학자로 기록하고 있다.
필자 박영욱 (사)한국국방기술학회 이사장은 서양과학기술사를 전공한 뒤 20여 년간 국방과학기술 정책 전문가로 활동하며 한국 대표 글로벌 싱크탱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과학의 역사에서 만나는 전쟁이야기 - ‘근대 화학의 아버지’ 라부아지에 원소-화합물 구성으로 물질 설명…근대 화학체계 기틀 잡아
1789년 ‘화학원론’ 통해 주요 원소 구분하는 분류체계 정립
1775년부터 1791년까지 프랑스군 화약 성능 개량·보급 책임자
부인 마리 앤 폴즈, 평생 모든 연구 함께하며 체계적·분석적 지원
고전주의 미술의 대표적인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라부아지에 부부의 초상.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누구나 중·고교 시절, 원소 이름과 함께 주기율표를 고생스럽게 외워야 했던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주기율표는 1869년 러시아의 화학자 멘델레예프가 처음 선보였는데, 이 표는 그에 앞서 물질이론을 설명하고자 했던 여러 화학자가 축적한 성과의 총합으로 볼 수 있다.
1차적으로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각 원소의 주기성을 질량 차이로 구분하고, 물질의 원소 기본단위를 원자 입자로 설명한 영국 화학자 돌턴의 ‘원자론’(1809)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다. 돌턴 역시 산소를 비롯해 33종의 주요 물질 원소의 존재와 성격을 최초로 규명한 라부아지에 업적의 후속 연구로 원자론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결국 자연세계의 물질과 물질현상을 원소와 화합물의 구성으로 설명하면서 근대 화학이론을 체계화한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1743~1794)가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게 됐다.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법률가 가문 출신인 라부아지에는 법학을 전공했으나 물질과 물질현상을 다루는 화학에 매료되면서 18세기 화학혁명의 주역이 됐다. 그가 연구를 시작할 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이나 파라셀수스의 3원리설을 거쳐 플로지스톤 이론으로 모든 물질의 본질과 현상을 설명하던 시대였다. 화학자들은 실험을 바탕으로 물질현상을 다루면서도 여전히 정성적 설명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연소현상을 포함해 화학반응을 모든 물질에 빠짐없이 들어가 있는 ‘플로지스톤’ 입자의 결합과 분리로 설명했다.
이러한 플로지스톤 이론을 폐기하고 중세적 물질론에서 탈피해 근대 화학의 체계를 정립한 주인공이 바로 라부아지에였다. 그는 엄청난 성실성과 열정으로 고된 실험과 연구를 지속했는데 연소현상에 대한 끈질긴 실험과 추론 과정을 거듭하면서 공기 중 산소 원소의 존재를 확인, 플로지스톤 이론에 기대지 않는 혁신적 이론체계를 제시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산소와 질소, 탄소의 이름도 그가 붙였다. 규칙과 원칙을 적용함으로써 원소뿐 아니라 원소들이 결합한 화합물에도 체계적으로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명명법’이 탄생했다. 그와 함께 규칙성에 기반을 둬 주요 원소들을 특성에 따라 구분하고 그룹화하는 ‘분류체계’ 역시 라부아지에가 1789년 출간한 『화학원론』에 소개했다.
이뿐만 아니라 라부아지에는 오늘날 너무도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질량보존의 법칙’, 즉 화학반응 전후 물질의 무게 합이 동일하다는 실험 결과를 보편법칙화함으로써 화학이 정성적 물질론에서 탈피해 정량적·계량적 토대를 갖춘 근대 과학의 당당한 일원으로 탈바꿈하도록 이끌었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18세기 전반, 갈릴레오와 뉴턴의 과학혁명을 거쳐 지상의 물체운동과 함께 하늘의 행성 등 천체운동이 수식화된 역학과 물리학의 동일 법칙으로 설명되는 근대 천문학과 물리학이 완성된 것처럼 화학도 라부아지에에 이르러 근대 과학의 일원으로 대접받게 됐다. 겉으로는 도저히 수학적 법칙으로 계량화·단순화할 수 없을 것 같은 세상의 수많은 물질과 물질현상들을 단 몇 종류의 원소와 원자, 그리고 원소 간 화합물의 결합과 분리의 반응 과정으로 체계적·정량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근대 화학체계의 기틀을 라부아지에가 잡은 것이다.
한편 과학자가 전문직업인으로 변모하게 되는 과도기의 상징적 인물이 바로 라부아지에이기도 하다. 그는 프랑스혁명을 전후한 근대 국가 성립기에 국가의 군사적 임무를 훌륭히 수행함으로써 과학자가 전문직업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770년대 초반, 프랑스 군대는 머스킷 총과 화포 등 최고 수준의 신무기체계를 갖추고도 화력의 관건인 화약 품질이 떨어져 고전하고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어려운 국고 사정에도 불구하고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의 독립전쟁에 엄청난 재정·군사지원을 강행했는데, 그 와중에 재무장관 튀르고가 화약 성능 개량의 막중한 임무를 라부아지에에게 맡겼다. 이를 계기로 라부아지에는 1775년부터 1791년까지 프랑스군 전체의 화약 개량뿐 아니라 병기창 운영과 보급행정의 총괄책임자가 됐다.
탁월한 능력으로 화약 성능과 화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던 그의 업적 덕분에 혁명기부터 나폴레옹 시대 들어 프랑스는 전 유럽을 지배하는 군사력의 토대를 다질 수 있었다.
당대 과학자들의 실력을 신뢰해 국가와 군대 경영에 활용하고자 했던 튀르고는 파리에만 4곳의 병기창을 만들면서 무기를 개발하고 개량하는 실험실을 같이 설치했다.
그중 매우 훌륭한 실험설비와 보조인력을 쓸 수 있는 한 곳을 전적으로 라부아지에에게 맡겼고 그는 이 병기창의 사택과 실험실에서 안정적으로 연구와 업무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는 정부가 과학자들에게 독립된 연구공간과 기회를 제공하면서 국가 경영과 군사적 목적의 연구를 맡긴 최초이자 대표적 사례로 볼 수 있다.
이제 과학자들은 개인적 취미가 아니라 국가 경영과 군사 영역에서 공적 임무를 수행하는 전문직업인으로 인정받게 됐고 국가 권력도 과학자들을 체계적·제도적으로 동원함으로써 국가 운영과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관리·운영하는 시스템을 얻게 됐다.
그러나 여기서 유념할 점이 있다. 라부아지에가 당시 그의 산소이론을 위시한 화학적 연구 결과를 그대로 적용해 화약 품질과 무기 개량의 성과를 얻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다음 회차에 다룰 몽주나 라플라스, 라그랑주 등 당대 수학자와 과학자들 역시 그들의 실력과 성과가 수학·물리학 이론을 군수품 개발과 개량에 바로 적용한 결과라기보다 연구 수행 과정에서 체득한 계량적이고 합리적이며 체계적인 실험방법이나 사고방식, 과학적 태도가 바탕이 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당시 무기체계의 수준은 과학기술적 연구개발의 결과라기보다는 수많은 시도와 경험, 그리고 시험과 실험의 반복에 의해 누적적으로 발전되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고 풀이할 수 있다.
생폴항구에서 화약제조법에 대해 설명하는 라부아지에. 필자 제공
라부아지에는 초인적 열정과 성실성으로 실험실의 고된 노동과 연구를 감내하면서 연구에 매진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가 ‘근대 화학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혼자만의 업적이라기보다 그의 옆에서 실험과 기록, 집필에 이르기까지 평생 모든 연구를 함께했던 부인 마리 앤 폴즈의 도움에 크게 힘입었다는 점에 과학사가들 간 이견은 없다.
과학의 역사에서 여성 과학자들의 업적이 제대로 조명받는 일 자체가 매우 드문 편이다. 그동안 마리 앤 폴즈는 라부아지에의 동료 과학자가 아니라 남편의 충실한 조수로서 주로 기술됐었다. 그러나 최근 라부아지에의 실험과 연구 성과는 부인의 체계적이고 계획적이며 분석적인 지원과 협업 없이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그녀 또한 스스로 살롱을 운영하면서 당시 계몽철학자를 위시해 프랑스를 대표하는 과학자·수학자들의 학문적 교류의 중심이 됐던 훌륭한 과학자이자 계몽사상가였다.
한편 라부아지에는 연구자금을 안정적으로 조달하기 위해 일찍이 징세청부인 권리를 샀는데, 이를 통해 실제 상당한 재정적 도움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면서 이 징세청부인 권리가 큰 문제가 됐다. 그간 중앙정부 대리로 징수업무를 해 돈을 챙기던 징세청부업자들이 구체제인 왕정을 대리해 민중을 핍박하는 반혁명집단으로 몰린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혁명을 지지했던 계몽사상가였음에도 불구하고 1794년 로베스피에르와 마라 등 급진파에 의해 화학자가 아닌 징세청부인으로 체포돼 단두대에서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당시 수많은 수학자와 과학자들이 화약과 무기체계를 개량·발전시켰던 라부아지에의 군사적 업적을 들어 구명운동에 적극 나섰다. 그러나 징세청부업자로서뿐만 아니라 엘리트 과학자집단을 향한 평민 장인과 수공업자들의 민중적 반감을 이겨낼 수 없었던 라부아지에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당시 프랑스를 대표하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라그랑주는 ‘라부아지에와 같은 천재의 머리를 얻는 데 100년이라는 세월도 부족하지만 불과 몇 초 만에 그 머리를 자르는’ 현실을 통탄했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결국 오늘날의 역사는 라부아지에를 프랑스군을 강군으로 만든 애국적이고 능력 있는 군사과학기술자이자 행정가, 그리고 근대 화학을 탄생시킨 위대한 화학자로 기록하고 있다.
필자 박영욱 (사)한국국방기술학회 이사장은 서양과학기술사를 전공한 뒤 20여 년간 국방과학기술 정책 전문가로 활동하며 한국 대표 글로벌 싱크탱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