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국방일보-ROTC중앙회 공동기획 ‘60년 전통 이어 미래로’

“수많은 생방송 무사 진행…군에서 배운 책임감 덕분”

노성수

입력 2021. 10. 18   16:53
업데이트 2021. 10. 18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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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차인태 전(前) 아나운서
 
임관부터 스타 아나운서 되기까지
1967년 ROTC 5기로 임관
입대 전 서울중앙방송국에 선발
연무대방송국서 기초 닦기도
 
국방일보와 특별한 인연
육군훈련소 정훈관 근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장병 위해
매일 아침 1톤 트럭 분량 신문 날라

 
ROTC 향한 무한 애정
동기회장만 18회·11대 중앙회장 재임
‘자랑스러운 ROTCian상’ 수상도

학생군사교육단(ROTC) 5기 출신으로 한국 방송의 전설인 차인태 전 아나운서가 서울 서초구 ROTC 중앙회관에서 자신의 군 생활을 회상하며 인터뷰하고 있다.
학생군사교육단(ROTC) 5기 출신으로 한국 방송의 전설인 차인태 전 아나운서가 서울 서초구 ROTC 중앙회관에서 자신의 군 생활을 회상하며 인터뷰하고 있다.
차인태 전 아나운서가 서울 서초구 ROTC 중앙회관에 자리한 명예의 전당 내 역대 회장들 사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차인태 전 아나운서가 서울 서초구 ROTC 중앙회관에 자리한 명예의 전당 내 역대 회장들 사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유행을 끈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본 40대 이상 기성세대가 특히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드라마에 사용된 한 클래식 음악을 통해 어린 시절 추억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기상 나팔소리와 같은 웅장한 그 음악은 바로 1970~80년대 장학퀴즈 시그널 음악으로 알려진 ‘하이든의 트럼펫 연주곡’이다. 매주 일요일 아침, 장엄한 시그널 음악이 흐르면 전국의 학생들은 장학퀴즈를 보기 위해 미래 우등생을 꿈꾸며 TV 앞에 모였다. 그리고 중심에는 진행을 이끌었던 차인태 전(前) 아나운서가 있었다. 학생군사교육단(ROTC) 출신으로 한국 방송의 전설로 자리매김한 그를 서울 서초구 ROTC 중앙회관에서 만났다.

“흔히 아나운서는 초(second)를 먹고 산다는 말을 합니다. 아나운서는 정해진 방송시간에 청취자 또는 시청자와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숙명이 있는 직업이기 때문이죠. 만약 단 1초라도 지체된다면 이는 곧 방송사고로 직결됩니다. 수많은 생방송 프로그램을 사고 없이 진행하며 국민께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군에서 배운 인내와 책임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전설의 방송인은 여든을 앞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꼿꼿한 자세와 변함없는 음성으로 기자의 질문에 능숙하게 답했다.

“저와 국방일보는 참으로 특별한 인연이 있죠. 군 복무 중 하루를 국방일보 배달로 열었으니까요.”

그는 ‘국방일보’가 새겨진 기자의 명함을 받아들자마자 50여 년 전 군 생활의 기억이 떠오르는 듯 감회에 찬 표정을 지었다. 연세대학교 성악과 출신인 차 전 아나운서는 1967년 ROTC 5기로 임관했다. ROTC 첫 정훈병과 보직을 받은 그는 육군2훈련소 25연대 정훈관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매일 아침 식사를 하기 전 훈련소에서 연무대역까지 배달되는 국방일보를 수령하기 위해 군용트럭을 몰고 갔던 기억이 나네요. 당시만 해도 육군 훈련병들이 모두 논산에서 훈련을 받던 터라 수령했던 신문만 해도 1톤 트럭 분량 정도였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장병들을 위해 신문을 수령·보급하면서 보람있게 아침을 열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클래식 음악도였던 그에게 군 정신전력교육을 담당하는 정훈병과는 낯설었던 것도 사실. 하지만 초급장교로서 당시 엄중했던 국가 안보 현실 속에서 장병들에게 올바른 안보관을 심어주며 정예 장병을 육성하는 데 작은 역할을 담당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사회 구성원들의 학력 수준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어요. 학교를 한 번도 다니지 않은 무학자도 있다 보니 제식훈련 구령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죠. 장병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정체성을 함양시키고, 고된 훈련 속에서 긴장을 풀어주며 사기를 독려했던 기억이 납니다.”

입대 전 이미 서울중앙방송국 아나운서로 선발됐던 그는 군에서도 재능을 살려 군 방송의 기초를 닦는 데 기여했다. 육군 연무대방송국을 직접 운영한 것. 그는 정훈병 몇 명과 힘을 합해 기상 시간부터 취침 시간까지 육군훈련소 방송을 이어갔다.

“기상 나팔부터 소리가 일정하지 않아 재정비가 필요했어요. 마땅히 지원받을 곳도 없는 형편이라 직접 방송국에 찾아가서 군 장병들을 위한 나팔소리를 녹음해 달라고 부탁했죠. 그렇게 어렵사리 녹음된 기상나팔 녹음 테이프로 방송 기반을 마련했죠. 일과 틈틈이 훈련병들을 위해 최신 가요를 틀어주고 싶은데도 변변한 LP판 하나가 없었어요. 그래서 당대 최고의 가수를 배출한다는 지구레코드를 찾아가서 ‘군 장병을 위해 음악을 틀어주고 싶은데 LP판을 주실 수 있느냐’고 물었어요. 지구레코드 관계자께서 ‘육군소위 계급장을 달고 LP판을 달라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하시며 껄껄 웃더니 호쾌하게 ‘챙겨줄 수 있는 만큼 다 챙겨주겠다’고 하셨죠. 그렇게 훈련병들이 좋아하던 가수 정훈희, 문주란 씨의 레코드판을 구해 들려줬어요.”

그는 아마도 당시 육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다면 연무대방송국의 특별한 기억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자부했다.

“‘훈련병 여러분!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습니다’라고 하루 방송을 마무리할 때마다 모포를 덮고 고향의 가족을 그리워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훈련병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보람으로 가득 찼던 나날이었습니다.”

그는 부대에서 야학교실도 운영했다. 부대 인근에 거주하는 아이들의 학습지도를 담당하는 군인 선생님으로 국어와 영어를 지도했던 것. 먼 훗날 그가 종횡무진 브라운관을 누비며 활약하고 있을 때, 그때 그 아이들이 찾아와 “차 소위님 덕분에 공부에 흥미를 갖게 돼 상급학교에 진학하게 됐습니다”라고 말해 감회가 남달랐던 적도 있었다고 했다.

전역 후 그는 문화방송 간판 프로그램과 굵직한 대형 행사 진행을 맡으며 ‘원조 스타 아나운서’의 길을 걸었다. 앞서 언급한 장학퀴즈를 18년간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10대 가수 가요제 등을 진행하며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이렇게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가운데서도 그는 ROTC와의 인연을 놓지 않았다. ROTC 5기 동기회장을 무려 18회 맡았고, ROTC 중앙회 11대 회장으로도 재임했다. 특히 지난 2000년에는 국가 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ROTC의 대외적 위상을 제고한 동문에게 시상하는 ‘자랑스러운 ROTCian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있는 후배 장병들을 격려하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단기 또는 장기로 복무하든 군 장교는 책임이 따르는 어려운 위치입니다. 초임장교로서 여러 고충이 닥치더라도 차근차근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면 앞으로 자신이 살아가는 데 큰 자산이 될 것입니다. 지휘관·병사 간 소통 채널로서 역할을 다해 부대 전투력 증진에 기여해 주기 바랍니다.” 글·사진=노성수 기자

 
차인태 전 아나운서는 △1944년 평안북도 벽동군 출생 △연세대학교 성악과 졸업 △예비역 육군중위(ROTC 5기) △전 MBC 아나운서 △제주 MBC 대표이사 △행정자치부 평안북도 지사 △Live on e-커머스 아카데미 회장


노성수 기자 < nss1234@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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