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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신기루였을까…아랍 민족 통일 국가는

입력 2021. 09. 15   16:22
업데이트 2021. 09. 15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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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 로렌스의 무너진 희망 -스콧 앤더슨 『아라비아의 로렌스』
 
아랍 문화·언어 능통한 英 장교 로렌스
정부 지시로 1차대전 중동권 참전 설득
오스만제국 쟁취했지만 열강 약속 어겨
아랍인의 영웅서 제국주의 하수인 전락
국왕 면전 작위 거부하고 교통사고 사망

 

스콧 앤더슨 저서 『아라비아의 로렌스』.
스콧 앤더슨 저서 『아라비아의 로렌스』.


1918년 10월 30일.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이 불과 2주도 남지 않았을 무렵 영국 국왕 조지 5세는 버킹엄 궁전으로 한 장교를 호출했다. 조지 5세는 전쟁 공로를 인정해 장교에게 기사 작위를 직접 내릴 예정이었다. 그 장교는 기사 작위를 거부하면서 국왕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오히려 예식을 진행하는 도중 국왕에게 자신에게 수여되는 영광을 거두어 달라고 말한다. 여왕은 격노했으나 장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궁을 떠났다.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필자 제공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필자 제공

그 장교의 이름은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1888~1935)다. 전쟁 중 중동 지역에서 공을 세워 뜨거운 환영을 받았으나, 그는 조국에 큰 환멸을 느꼈다. 미국의 국제분쟁 전문기자인 스콧 앤더슨은 저서 『아라비아의 로렌스』(글항아리, 2017) 도입부에 영국 왕실의 기사 작위 수여를 거부한 이 에피소드를 제시하면서 로렌스의 여정을 추적한다.

어린 시절부터 고고학에 흥미를 느꼈던 로렌스는 옥스퍼드 대학 역사학과에 진학했다. 그리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진행되는 발굴 작업에 참여하면서 로렌스는 아랍인들의 문화와 언어를 배웠다. 이 과정에서 로렌스는 서구의 ‘계몽주의적 소명’에 회의를 품게 됐다. 로렌스는 중동에서 아랍인들뿐만 아니라 독일·미국 기업인과도 교류하면서 우정을 쌓았다. 아랍인들의 다양한 문화를 접한 로렌스는 그들이 오스만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유럽 국가와 동등한 입장에서 교류하는 미래를 상상했다.

그러나 국제 정세는 로렌스의 바람과는 다르게 전개됐다. 오랜 세월 중동 지역을 지배했던 오스만제국이 힘을 잃자 유럽 열강들은 앞다퉈 중동 지역으로 진출했다. 영국은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하고 수에즈 운하를 경계로 오스만 군대와 대치했다. 프랑스는 영국과 동맹을 맺고 시리아 지역을 장악했다. 오스만제국과 동맹을 맺은 독일은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고 경제협력을 강화했다. 유럽 국가 사이의 세력 갈등은 중동에서 그대로 재연됐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카이로에 주둔한 영국군 사령부는 중동에 대한 지식이 해박한 역사학도 로렌스를 정보부 장교로 발탁했다. 로렌스의 임무는 시나이반도 지도 작성과 아랍인들의 동태 파악이었다. 로렌스는 경직된 조직 문화, 학연으로 끈끈하게 얽힌 피라미드 구조를 지닌 영국 군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더구나 유능한 장교들은 대부분 유럽 전선으로 차출된 상태였다. 로렌스는 중동 정세를 정확히 분석한 보고서로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군대 조직에는 끝내 적응하지 못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중동 지역에서 영국과 오스만제국의 충돌 가능성은 점차 커졌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패배한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중동 지역에서 오스만제국을 압박할 방법을 찾았다. 주력 부대가 모두 유럽 전선에 주둔한 영국은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고 반란을 일으킨 아랍인들을 끌어들이고자 했다. 아랍인들과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그들을 잘 아는 로렌스가 적임자였다. 영국은 로렌스를 아랍 지역에 파견해 반군 지도자 파이살 왕자를 만나게 한다. 로렌스는 아랍인들이 오스만제국에 맞서도록 설득하면서 아랍 해방을 약속으로 내걸었다. 이것은 한 개인의 권한을 뛰어넘는 약속이었다. 여러 부족으로 구성된 아랍인들은 반신반의했으나, 그들은 곧 로렌스를 신뢰하게 됐다.

로렌스와 아랍인들의 투쟁을 다룬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 스틸컷.  필자 제공
로렌스와 아랍인들의 투쟁을 다룬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 스틸컷. 필자 제공


이 무렵 유럽 전선의 전황은 최악이었다. 영국의 공세는 실패했고, 독일의 잠수함은 해양 수송로를 위협하고 있었다. 국내 정치가 혼란에 빠진 러시아도 패전을 거듭했다. 위기에 몰린 영국은 아랍인들이 오스만제국과 독일을 조금이라도 압박해 부담을 덜어주길 원했다. 이미 수백 만의 사상자를 낸 연합군은 중동 지역에 추가로 병력을 파견할 여력이 없었다. 영국은 중동 지역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지만, 아랍인들의 민족주의와 독립 열망을 집요하게 자극했다. 로렌스가 어떻게 아랍인들과 친구가 되고, 그들을 설득했는가는 영국 정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로렌스는 아랍 복장을 하고 아랍인들과 함께 싸웠다. 아랍 부족들은 오스만제국과의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했고, 전략적 요충지인 아카바항과 다마스쿠스까지 점령했다. 로렌스는 아랍인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거대한 전리품’으로 취급한 연합군의 본색이 드러났다. 로렌스와 힘을 합친 아랍인들이 오스만제국과 힘겹게 전투를 벌이기 전부터 이미 영국, 프랑스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은 상태였다. 영국은 이라크와 요르단을 차지하고, 프랑스는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레바논을 각각 차지하기로 하며, 팔레스타인을 공동관리구역으로 설정하는 것이 협정의 내용이었다. 이 협정에서 아랍인들의 입장은 완전히 배제됐다.

종전 이후 영국은 오스만제국에 대한 저항의 대가로 아랍 민족에게 주기로 약속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인들에게 넘겼다. 자신들의 독립 투쟁이 결국 영국의 세계대전 승리를 도운 것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랍인들은 분노했다. 아랍인들의 영웅이었던 로렌스는 순식간에 제국주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영국에 귀국한 로렌스는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하려고 노력하면서 아랍을 옹호하는 열정적인 칼럼을 기고했다. 그러나 정부 관료들은 그를 철저하게 무시했다. 로렌스는 이제 영국 정부에 필요 없는 존재였다. 언론사들은 로렌스의 모험을 미화하면서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이름의 대중 강연을 요구했다. 이 상황에 절망한 로렌스는 모든 활동을 접고 은거에 들어갔다. 전후 식민성 장관이 된 처칠이 중동 문제에 조언을 요구해도 로렌스는 응하지 않았고, 이라크 국왕이 된 ‘사막의 전우’ 파이살과 재회했을 때도 침묵을 지켰다. 그는 매우 심각한 전쟁 후유증을 앓았다.

로렌스를 절망으로 몰고 간 비밀협정의 주인공인 영국의 마크 사이크스(왼쪽)와 프랑스의 조르주 피코.
  필자 제공
로렌스를 절망으로 몰고 간 비밀협정의 주인공인 영국의 마크 사이크스(왼쪽)와 프랑스의 조르주 피코. 필자 제공

1935년 로렌스는 모터사이클을 몰다가 교통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져 6일 후 사망했다. 처칠은 로렌스를 애도하며 “이제 아무리 원해도 그와 같은 인물을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두렵다”고 적었다. 오늘날 로렌스를 비판하는 자들은 ‘그가 꿈꿨던 아랍인들의 통일 국가는 신기루 같은 역사학도의 망상’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사이크스·피코 협정’이라는 최악의 선택이 낳은 중동의 비극을 떠올릴수록 로렌스가 지녔던 희망을 긍정하고 싶어진다.


필자 이정현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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