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정은정 조명탄] 당신들의 청춘을 응원합니다

입력 2021. 06. 18   16:33
업데이트 2021. 06. 18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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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은 정 
농촌사회학 연구자·작가
정 은 정 농촌사회학 연구자·작가


글로 밥을 벌어먹고 산다고 해서 나 같은 사람들을 ‘글로생활자’라고들 한다. 책도 내고 종종 이곳저곳에 글을 써서 생계를 구성하는 일이 만만치 않지만 그나마 이런 얕은 기술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어쩌다 글을 쓰는 직업을 갖게 됐을까? 그건 짜장면의 힘이었다. 학교에서 상장을 받아오면 엄마가 짜장면을 사주었는데 그 재미에 빠져서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 써보다 얼추 글꼴을 갖췄다. 글로 첫 짜장면을 먹었을 때가 초등학교 3학년, 6월로 기억한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에는 반공 포스터 그리기, 반공 웅변대회, 반공 글짓기대회가 열렸고 글 써서 짜장면 먹기 좋은 달이었다. 1930년생인 큰아버지가 6·25 전쟁에서 전사하셨기 때문이다. 게다가 1970년 맹호부대 소속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외삼촌도 전사자였다.

현충일은 누군가에게는 휴일이었지만 우리 집은 ‘동작구 국립묘지(현 국립서울현충원)’로 성묘 가는 날이었다. 일 년에 딱 한 번 화원에서 돈 내고 꽃다발을 사는 날이기도 했다. 하얀 화선지에 말려 있는 국화꽃 두 다발을 가지고 전철을 타면 어린 우리는 서로 꽃다발을 안고 가겠다고 티격태격하곤 했다.

흰 국화 꽃다발을 안고 동작구 국립묘지로 간다는 것은 전쟁유공자 집안임을 드러내는 은근한 자부심이기도 했다. 전철 안 사람들이 모두 우리 가족을 존경스러운 눈으로 보길 바랐지만 전철에는 국립묘지로 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나는 장면은 소복을 입은 할머니들이 꽤 있었다는 것이다. 그 여인들은 전쟁통에 젊은 남편을 잃은 아내들이었고 그녀들의 머리카락이 흰 국화만큼 하?다.

그늘 한 점 없는 국립묘지에 가서 꽃다발을 꽂고 묵념을 올리고 나면, 노점상들이 얼음 채운 아이스박스에 넣어 두고 파는 음료수에 온 마음을 빼앗겼다. 각자 먹고 싶은 깡통 음료수 하나씩을 고를 수 있었는데 그 재미가 퍽 좋아서 따라나선 길이기도 했다. 이렇다 할 나들이가 없던 때였고, 동작구 국립묘지를 찾아가는 일은 즐거운 나들이였다.

6월이 돼 백일장이 열리면 큰아버지를 죽게 만든 공산당에 피의 복수를 하겠다는 핏대 올린 글을 쓰기도 했다. 자라면서 반공보다는 반전과 평화에 무게를 실어 글을 썼다. 하지만 정작 삼촌들이 전장에서 전사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을 뿐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궁금해진 것은 머리가 굵어지고 짜장면도 시들해졌을 때였다.

스물한 살에 입대해 스물세 살에 전사한 큰아버지는 성품이 온화해 어린 동생들에게 목소리 한 번 높이는 일 없이 한글과 셈법을 차분하게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막내 외삼촌은 파병 전 휴가를 나와 당시 돌쟁이였던 큰언니를 몇 번이나 얼러주고 갔다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들었다.

전사 소식의 충격으로 양가 조부모님들은 혼절하고 할머니는 시력을 잃었다. 집안의 기둥 노릇을 하던 아들이 전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집안엔 그늘이 짙어진다. 상급 학교에 꼭 보내주마 약속했던 큰형이 없으니 아버지는 진학도 못하고 생업전선에 나서야 했다. 똘똘한 동생을 서울 유학 보내 뒷바라지하던 큰외삼촌은 삶의 보람을 잃었다. 전사 몇 명. 부상자 몇 명, 이런 숫자에 가둘 수 없는 삶과 사연이 그렇게 함께 묻히는 곳이 전쟁터다.

올해 6월에도 영원한 이십대의 삼촌들을 내세워 국방일보 연재의 마지막을 메운다. 당신들에게 삼촌들의 이야기를 꼭 들려주고 싶었다. 당신들은 내 삼촌들이 이루지 못한 빛나는 미래이자 꿈이기 때문이다. 푸른 군복보다 더 푸른 당신들의 청춘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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