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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강대국 침략에 불굴의 항전으로 조국 지켜

입력 2021. 06. 16   16:30
업데이트 2021. 06. 16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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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살달비각과 항몽전쟁


몽골을 죽이자고 팔에 새기다

13세기 최강 몽골군 대규모 공격에
팔뚝에 각오 새기고 결사항전 승리
명·청·프랑스 식민지배까지 극복
中 천년지배 끊은 후 외세 허용 안 해


호찌민시 역사박물관에는 바익당강(오늘날 송코이강) 바닥에서 건져 올린 나무말뚝이 전시돼 있다.  필자 제공(일러스트 한가영)
호찌민시 역사박물관에는 바익당강(오늘날 송코이강) 바닥에서 건져 올린 나무말뚝이 전시돼 있다. 필자 제공(일러스트 한가영)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추모와 감사 열기 뜨겁다. 고려가 몽골 침략에 처인성과 삼별초 항쟁으로 맞섰다면 베트남은 바익당강 수전(水戰)으로 격퇴했다. 진시황 이후 중국 통일 역대 왕조들은 예외 없이 베트남을 넘보았다. 베트남은 강대한 외적 침략에 맞서 민족 역량을 모았다.


베트남의 중국 천년 지배 항쟁

베트남이 중국의 천년 지배를 받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11년이다. 한(漢) 무제가 남중국과 베트남 북부지역 일대에 존재했던 남비엣을 점령했던 때부터다. 서기 40년 쯩짝·쯩니 자매는 남비엣 파견 후한 관리의 폭정에 항거하여 봉기했다. 한나라에 정복된 지 150년 만에 일어났다. 비록 저항은 3년 만에 진압됐으나 독립 정신의 씨앗이 됐다.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의 베트남 수탈은 더욱 극심했다. 672년 당나라는 짜오쩌우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해 지배를 강화했다. 비단과 상어, 악어가죽 등 각종 특산품 조공과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8세기 중엽 홍수와 가뭄이 계속돼 베트남인들의 삶은 참혹했다. 그러나 크고 작은 봉기는 끈질겼다.

당이 멸망하자 남한(南漢)이 남중국 광둥성과 광시성 일대를 지배했다. 938년 남한은 바다와 내륙으로 침공했다. 남한 유홍조는 병력 1만 명으로 바다와 강을 통해 교두보 확보를 시도했다. 육로로는 유엄이 남하했다. 훗날 베트남 응오 왕조를 세우게 되는 응오꾸엔은 병력을 바익당강 기슭에 매복시켰다. 강바닥에 나무기둥 끝을 쇠로 덮은 말뚝 수천 개를 박아놓았다. 베트남군은 남한 수군을 강 상류로 유인했다. 밀물이 썰물로 바뀌는 순간 베트남 수군이 반격을 가했다. 동시에 강가 숲에 염초와 건초더미를 준비하고 매복해 있던 병사들은 일제히 화공을 펼쳤다. 바익당강 전투 승리로 중국 천년 지배의 사슬을 끊었다.


몽골의 두 번 침략을 격퇴

13세기 세계 최강 몽골은 고려와 북송을 차례로 굴복시켰다. 1257년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베트남을 침공했다. 몽골은 공격 전 쩐 왕조에 사신을 보내 “남쪽에서 남송을 공격하려 하니 군대가 통과할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했다. 가도벌송(假道伐宋)이었다. 쩐 왕조는 몽골 요청을 단호히 거부했다. 쩐흥다오에게 전군 지휘를 맡겨 북쪽 방어를 강화했다.

몽골군은 예상과 다른 방향에서 공격해 왔다. 서측방 홍강과 로강 기동로를 따라 내려와 하노이를 점령했다. 몽골군은 남송 공격을 위해 북쪽으로 다시 이동했다. 쩐흥다오는 몽골군 이동로를 따라 게릴라 공격으로 큰 피해를 주었다. 결국 몽골군은 철수했다.

몽골은 국호를 원(元)으로 바꾸고 1279년 남송마저 정복했다. 다시 베트남 정복에 역량을 집중했다. 1283년 2차 침공을 개시했다. 원군 1만여 명은 해상으로 베트남 북부를 우회해 참파 수도 비자야 인근에 상륙했다. 원정군은 중부 뀌년까지 진출했으나 태풍으로 큰 손실을 입었다. 다음 해 50만 대군이 3개 방향으로 침공했다. 쩐흥다오 병력은 20만 명이었다. 그는 전국 유지들에게 저항이냐 항복이냐를 물었다. 모두 죽더라도 항전을 결의했다. 이것을 연홍회의(延洪會議)라 부르며 외세 저항의 정신적 표상으로 삼고 있다. 1285년 수도 하노이가 함락됐으나 다시 탈환했다.


원(몽골)의 3차 침략과 살달비각

1287년 11월 몽골 쿠빌라이 아들 토곤의 30만 대군이 다시 베트남 국경을 넘었다. 3차 침공은 지상과 해상 합동작전이었다. 제1군은 1차 공격로인 서북지역 홍강을 따라 공격하고, 제2군은 2차 공격로인 동북지역 랑선에서 공격했다. 제3군 수군은 하롱만에서 바익당강을 따라 하노이 방향으로 공격했다. 베트남 장병들은 팔뚝에 ‘살달(殺달·몽골군을 죽이자)’을 새겼다. ‘살달비각(殺달臂刻)’이다. ‘달(달)’은 몽골지역 유목민 달단에서 나왔다. 무릎 꿇지 않는 베트남 대(對) 중국 『천년전쟁』에 나온다.

쩐흥다오는 도시와 농촌을 비웠다. 원나라군의 식량 조달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청야(淸野) 작전이었다. 그들이 점령한 요충지를 기습하거나 바익당강 게릴라전으로 해상 보급을 차단했다. 원나라군은 결국 해상으로 철수를 시도했다. 쩐흥다오는 결전을 준비했다. 강바닥에 나무말뚝(鐵木·아카시아계통 나무로 무겁고 단단함)을 박아놓았다. 강변에는 염초와 볏짚을 실은 배들을 매복시켰다. 350년 전 응오꾸엔이 남한군을 물리친 전술의 재현이었다. 몽골 전함들이 썰물로 낮아진 강바닥 나무말뚝에 걸려 넘어지는 틈을 타서 화공으로 격멸했다.

베트남은 한 번 지배당한 후 다시는 지배를 허용하지 않았다. 몽골로부터 세 번이나 공격받았지만, 멸망 직전까지 가면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명나라가 식민지로 삼자 게릴라전으로 20년 만에 축출했다. 1788년 청나라군이 하노이를 일시적으로 점령했으나 응우옌반후에가 쫓아냈다. 20세기에는 프랑스 지배를 받다가 디엔비엔푸전투로 몰아냈다. 1954년 남북으로 분단됐으나 끝내 통일을 이루었다. 베트남은 강대국의 수차례 침략을 끈질긴 항전으로 굴복하지 않았다. 바익당강에 쇠로 덮은 나무말뚝은 천 년을 견디며 강바닥에 튼튼하게 박혀 있다. 오늘날 많은 베트남 젊은이들은 한국어 배우기에 열중한다. 우리는 베트남 ‘살달비각’ 정신을 배워야 한다.


필자 오홍국 국제정치학박사는 역사안보·전략전술·재난안전 등 다양한 분야 집필과 기고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손자와 클라우제비츠에게 길을 묻다』·『간접접근코드』 등이 있다.
필자 오홍국 국제정치학박사는 역사안보·전략전술·재난안전 등 다양한 분야 집필과 기고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손자와 클라우제비츠에게 길을 묻다』·『간접접근코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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