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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동아일렉콤 이건수 회장 "군에서 성실하면 사회서 성공… 시간 활용 잘해야"

조아미 기사입력 2021. 05. 10   17:03 최종수정 2021. 05. 10   18:38

8 (주)동아일렉콤 이건수 회장
 
통신1세대 기업인으로 40년 ‘외길’
전원장치 생산 기업 이끌어
불우한 어린시절·실직 어려움 딛고
5억 짜리 회사 누적매출 2조 키워
 
3대 독자에도 ROTC 장교 2기 임관
소대장 근무하다 최전방 투입 자청
220여 억 기부…사회 환원도 열정 
남은 생 목표 방산 전원장치 국산화
 

인터뷰 내내 파안대소(破顔大笑)가 절로 터졌다. 1970~80년대 우리네 아버지들이 젊음을 태워 일궈낸 승리의 웃음이다. 절박하게 시작해 기업을 성공으로 끌어올린 무용담을 맛깔나게 풀어냈다. 통신용 전원장치를 생산하는 ㈜동아일렉콤 이건수(학군2기·78·사진) 회장은 ‘정보통신분야의 원로’로 불린다. 황무지에서 출발해 오늘의 통신 한국을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이 회장은 일에 대한 열정, 성공에 대한 확신, 탱크 같은 추진력과 결단력으로 무장하고 질풍노도의 세월을 거친 통신 1세대 기업인으로 평가받는다. 회사는 현재 50여 개국에 전원기술을 수출하는 에너지 절약 기업으로 건실하게 성장했다. 지난 6일 서울 중구 퇴계로 이 회장의 집무실에서 40여 년간의 경영자 생활과 함께 여든 살 인생 철학을 들어봤다.

글=조아미/사진= 한재호 기자


아메리칸 드림 실현 후 부도 위기 기업 인수

1942년생인 이 회장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6·25전쟁을 눈으로 보고 겪었다. 열차 지붕에 올라타고 대전으로, 대구로 피난 다니면서 초등학교도 몇 번씩 건너뛰었다. 어렵게 성장한 이 회장은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재학 중에도 4·19혁명, 5·16군사정변을 겪은 이 회장은 졸업 후 ROTC 장교로 전방 소대장 생활을 마치고 무역회사에 취직했다. 1년 반 만에 이 회사가 부도가 나버리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었다.

“실직 후 무작정 단돈 100달러와 가발 100개가 담긴 가방을 들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어요. 국내에서 개당 11달러50센트에 사간 가발이 미국 미장원에서는 500달러에 팔리더라고요. 미국 간 지 6개월 만에 뉴욕 맨해튼 29가 아메리카애비뉴의 부도난 보석상 자리에 가발 가게를 차린 게 첫 사업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이 회장은 샌디에이고에서 소니아메리카(Sony America) 회사에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의 공장장으로 일했다. 이어 중동에 원자재를 파는 무역업을 시작했는데 마흔 즈음 2000만 달러의 재산을 가진 거부가 됐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고국으로 돌아가 첨단기술을 개발하는 제조업을 해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1985년 말 한국에 들어왔다가 친구로부터 “통신용 전원장치를 개발해 놓고 자금이 모자라 부도 직전에 몰린 기업이 있는데 인수해 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미국에서 통신장비 유통업을 하며 첨단분야에 어느 정도 식견을 쌓은 그는 ‘기술만 확실하다면 한번 해볼 만한 도전’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1986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건수 회장이 모교인 경희대학교 ROTC총동문회로부터 받은 ROTC 임관반지 모형 공로패를 들어보이고 있다.
갖은 어려움 이겨내고 기술개발에 전력

경기 구리시에 있는 동아일렉콤 공장을 처음 방문했을 때 무척 실망했다.

“회사가 악취 나는 하천가에 있었는데 폐품창고처럼 보이더라고요. 하지만 회사를 인수하기로 결심한 것은 120명 직원의 눈빛과 기술 연구진의 열의를 확인하고 나서였습니다. 첨단기술을 국산화해 놓고도 자금이 모자라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는 상황에서 그들은 회사를 지키며 새로운 구세주가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던 거죠.”

전기·전자에 문외한이었던 이 회장은 미국에 있던 재산을 처분, 자금을 마련해 회사를 정식 인수했다. 이후 1987년 연구소 설립에 30억 원을 투자했고 매년 연구개발과 자동화 설비 투자에 매출액의 8~10%에 달하는 돈을 쏟아부었다. 그는 “갖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공한 비결은 기술개발에 전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첨단기업은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바로 기술을 파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수 당시 연간 매출액이 5억~6억 원에 불과했던 회사는 누적매출 2조 원 규모로 성장했다.


어머니 영향 기부 시작, 군에 20억 성금

이 회장은 기부활동에도 열심이다. 그가 나눔을 펼치게 된 데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6·25전쟁 후 어느 날 대문 앞을 지나가던 한 가족이 먹을 게 없어 깡통을 들고 문을 두드리더라고요. 어머니는 자신이 먹을 따뜻한 보리밥 한 끼를 내어주고 자신은 묵은 밥을 여러 번 씻어 드시더라고요. 그때 어린 나이지만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기부에 대한 생각이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그는 그동안 지역 어린이집 지원, 소년·소녀 가장 돕기, 독거노인 후원, 국외 초등학교 설립 등 국내외에 220억여 원을 기부해왔다.

또 작전에 투입된 기간이 길어져 결혼식을 하지 못한 부사관들이 업체에 위약금을 물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위약금 대납과 함께 결혼식 비용을 전액 지원하는 등 군과 군 장병을 위해서만 20억 원 가까이 되는 성금도 내놨다.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 어려운 사람의 마음을 안다고, 처음 기업을 인수할 때 먹었던 마음처럼 이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잠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것보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많은 사람에게 배움의 기회를 줘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장학금과 배움의 터전을 만들어 주는 데 더욱 더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최전방 군 생활 지금의 자신이 있게 해


3대 독자인 이 회장은 굳이 군 장교로 군 생활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혼란의 시기였던 1960년대, 군대를 가야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고 생각해 ROTC에 입단했다. 1964년 임관 후 육군6사단에서 소대장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이때 인접 연대가 곧 전방 근무에 들어간다는 소문이 돌면서 다들 전방 근무를 기피하자 이 회장이 근무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 당시만 해도 전방에 철책이 어딨어요. 남북 관계가 엄중하던 시기였던 만큼 전방에 가면 목숨을 내놓는다는 심정으로 들어가야 했어요. 그래서 제가 참모장을 찾아가 최전방에 근무하고 싶다고 얘기해 전방에 가게 됐습니다.”

이 회장은 전방 투입 전 6개월 동안 정말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고 전했다. 장교 시절, 잠수정 간첩을 사살하거나 생포한 공적도 있다.

“군에서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사람은 사회에 나와서 꼭 성공합니다. 후배 여러분,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하세요. 앞으로 화려하게 비상할 여러분들의 젊음과 도전을 응원합니다.”

이 회장은 최근 또 한 번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마지막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국민이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방위산업 분야 전원장치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생애 모든 힘을 다해 국산화를 이루어 내겠다고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다.


조아미 기자 < joajoa@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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