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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귀걸이부터 순장 풍습까지… 1500년 전 비화가야를 만나다

박영민

입력 2021. 04. 13   17:20
업데이트 2021. 04. 13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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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사적 80호·81호 분리돼 있던 고분군
2011년 7월 사적 제514호로 통합 지정
수십 기였던 고분, 현재 24기만 남아

금 공예품·말 장식품·토기 등 출토
신라 문화 수용 독자생산 보여줘

송현동 15호분서 순장 인골 네 구 발굴
16세 추정 소녀 복원 모형 ‘송현이’ 전시

송현동 1지구 고분군에서 바라본 창녕 시내 전경. 앞에 보이는 큰 봉분이 ‘송현이’가 순장됐던 송현동 1지구 15호 고분이다.
송현동 1지구 고분군에서 바라본 창녕 시내 전경. 앞에 보이는 큰 봉분이 ‘송현이’가 순장됐던 송현동 1지구 15호 고분이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은 창녕읍 교동 및 송현동 일대에 널리 분포하고 있는 대형 고분군이다. 육 가야 중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인 비화가야의 고분으로 1500년 전의 가야문화를 조명해 줄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글=박영민/사진=조용학 기자/항공 사진=허준 기자


남녘의 꽃 소식이 전해지는 따뜻한 3월의 어느 봄날,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을 찾았다. 먼저 크고 작은 고분이 자리한 교동 고분군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촬영을 위해 고분 사이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올라갔다. 창녕읍 내에서 청도로 향하는 지방도를 사이에 두고 창녕박물관이 있고, 주변 산록에는 교동 고분군 수십 기가 산재해 있다. 또 교동 고분군과 함께 도로 건너편 창녕박물관 뒤쪽 송현동 고분군에도 커다란 고분들이 보인다.

순장된 ‘송현이’의 유골이 나온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창녕읍 교동과 송현동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가야 시대의 고분군이다. 화왕산 서쪽 능선의 목마산성 아래 창녕읍 교동과 송현동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대형 고분군으로, 일제강점기인 1911년 일본인 학자 세키노 타다시에 의해 처음 알려졌다.

비화가야 고분의 하나인 계성 고분 2지구 1호분의 횡구식 석실분 내부 모습.
비화가야 고분의 하나인 계성 고분 2지구 1호분의 횡구식 석실분 내부 모습.


본래 사적 제80호인 교동 고분군과 제81호인 송현동 고분군으로 분리돼 있었으나 2011년 7월 통합해 사적 제514호로 다시 지정됐다. 송현동에 80여 기, 교동에 수십 기의 고분이 있었으나 경작지로 바뀌면서 지금은 총 24기만 남아 있다. 무덤의 형태는 삼면의 벽을 할석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에 뚜껑 돌을 놓은 뒤 막지 않은 짧은 벽으로 시체를 안치하는 횡구식 석실분이다. 5세기 창녕이 신라였음을 증명하는 자료로 흔히 제시되는 교동 12호분은 신라 양식인 적석형식의 석곽묘가 아니라 수혈식 석실묘다.

1917년 분포조사를 시행했고 1918년에 교동 5~12호분과 21호분 및 31호분, 송현동 89호분 및 91호분이 발굴돼 마차 20대, 화차 2량 분의 부장품을 도굴하듯 캐냈으나 보고서는 간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같은 해 별도로 발굴돼 그 결과가 1918년 고적조사보고서로 발표된 교동 21호분과 31호분이 창녕 고분군에 대한 유일한 조사기록으로 남아 있다.

교동 1지구 7호분 봉토 토층단면을 재현해 놓은 야외 전시물로 구조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교동 1지구 7호분 봉토 토층단면을 재현해 놓은 야외 전시물로 구조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대대적인 발굴에도 불구하고 미비한 결과 처리와 보존관리 대책은 공공연한 도굴행위를 유발하는 화근이 됐고, 도굴된 유물들은 대구 지방 상인들의 손을 거쳐 일본으로 유출됐다. 국립도쿄박물관에서는 당시 일본으로 빼돌린 한국 문화재를 일명 ‘오쿠라 컬렉션’이라고해 무려 1856점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창녕에서 발견된 금동구조 관모 등 8점이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전시되고 있다.

이후 1992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1~4호분의 발굴조사를 해 횡구식 석실 구조와 봉토의 구획 성토 과정을 규명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했으며, 토기를 비롯한 각종 금속유물 등이 출토돼 창녕지역의 고분문화 및 편년 연구를 위한 기초적인 학술정보를 제공할 수 있었다. 한편 2001년에는 1917년 일본인에 의해 교동 고분군의 분포조사가 시행된 이래 처음 정밀지표조사가 이루어져 이미 복원된 36기 외에 65기의 고분을 추가로 확인했다.

또한 창녕에는 가야 시대의 무덤으로 1974년 2월 경상남도기념물 제3호로 지정된 계성 고분군이 있다. 창녕군 계성면 계성리와 사리 일대에 걸쳐 있으며 일명 계남 고분군이라고도 한다. 1967년 11월 큰 무덤 1기가 문화재관리국 주관으로 발굴됐고, 1968년과 1969년에 걸쳐 계남지구의 무덤 5기가 발굴됐다. 또 1976년 구마고속도로에 포함되는 도로부지 내 무덤 49기가 경상남도 주관으로 발굴 조사됐는데, 시체를 위에서 안치하고 덮어 만든 수혈식 석곽묘와 시체를 한쪽 벽으로 넣고 막음 하는 횡구식 석실묘, 항아리에 넣어 안치한 옹관묘 등 여러 가지 묘제가 확인됐다. 또한 여러 종류의 토기와 금·은으로 만든 각종 장신구, 철제 무기류, 농기구 등 많은 수량의 유물을 수습했다.

가는 고리에 사슬을 길게 늘이고 그 가운데에 원형 금판을 장식한 삼국시대(5세기 후반~7세기 전반)것으로 추정되는 금드리게.
가는 고리에 사슬을 길게 늘이고 그 가운데에 원형 금판을 장식한 삼국시대(5세기 후반~7세기 전반)것으로 추정되는 금드리게.


16세 소녀, 송현이를 만나다.

키 153.5㎝, 허리 21.5인치의 16세 소녀로 추정되는 ‘송현이’는 주인과 함께 순장됐다. 1500년이 지난 현재, 주인은 사라지고 불가사의하게도 송현이의 뼈는 온전히 남아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순장은 고대 국가에서 왕의 무덤에 사람을 묻는 풍습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가야에서 마지막으로 풍습이 행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대 국가 형성 이후 이 습속은 점차 사라지며 신라 지증마립간 3년(502년)에 법률로 순장을 금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송현동 고분군을 포함해 김해 대성동·양동리 고분군과 동래 복천동 고분군, 함안 도항리 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 경산 임당 고분군 등 영남지역에서만 국한돼 순장이 확인됐다.

2007년 창녕군 창녕읍 송현동 15호분의 발굴 현장에서 가야 최고 수장급의 무덤으로 추정이 되는 고분 안에서 네 구의 순장 인골이 발견됐는데 인골을 분석한 결과, 특이한 외상은 확인되지 않았고 발굴 당시 자연스러운 자세와 위치로 보아 매장되기 전에 중독사 또는 질식사한 것으로 추정됐다. 그중 상태가 좋은 인골 1구에 대한 복원연구가 국립 가야문화재연구소에 의해 2008년 7월부터 2009년 10월에 걸쳐 이루어졌다.

연구 방법은 뼈에 남아 있는 유전적, 법의학적 증거를 CT 촬영, 3D 스캔, 디지털복원 등을 통해 인체 조형학적 재구성을 거쳐 영화의 특수기법을 적용한 것이었다. 복원된 모습은 16세의 소녀로 턱뼈가 짧고 목이 긴 미인형이었다. 허리가 상당히 가늘고 팔이 짧은 편이었다. 발굴 당시 왼쪽 귀에 금동 귀걸이를 하고 있었는데 정강이와 종아리뼈의 상태로 보아 무릎을 많이 꿇는 생활을 한 것으로 판단돼 주인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시녀로 추정됐다.

박물관에 따르면 “일제강점기를 비롯한 숱한 도굴 속에서도 이렇게 완벽하게 발굴된 건 처음이어서 그 모습을 복원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한다.

비화가야의 문화와 역사의 단면을 조명해 볼 수 있는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은 일제강점기 시절 무분별한 발굴로 많은 유물들이 분실된 상태다. 사진은 교동 2지구 고분과 창녕박물관 모습.
비화가야의 문화와 역사의 단면을 조명해 볼 수 있는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은 일제강점기 시절 무분별한 발굴로 많은 유물들이 분실된 상태다. 사진은 교동 2지구 고분과 창녕박물관 모습.


보물 창고, 창녕박물관

창녕박물관은 교동 고분군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으며,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와 금 공예품, 장식 대도와 마구류 등이 전시돼 있다. 특히 이들 출토유물들은 비화가야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비화가야가 신라의 금 공예품 제작기술을 수용해 독자적인 생산체제를 구축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창녕지역 출토 관장식과 허리띠 장식, 귀걸이 등이 비화가야의 복식체계를 보여주고 운주·행엽·재갈 등 말 장식품은 신라문화와 융합된 비화가야의 특징을 드러낸 것에서 알 수 있다.

1996년 창녕유물전시관으로 문을 열어 1997년 박물관으로 승격된 창녕박물관은 연건평 1194㎡의 지하 1층, 지상 1층 건물에 선사시대부터 가야 시대까지 출토된 유물이 전시돼 있으며 고분 축조과정을 보여주는 디오라마도 마련돼 있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의 내부 구조도 잘 설명이 돼 있다. 겉모습을 보면 다른 고분군과 크게 다른 점을 느낄 수 없지만, 내부를 보면 시대와 문화를 잘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횡구식 석실분을 모형화해 출토유물을 전시한 공간을 지나면 제2전시실이다. 제2전시실에는 교동과 송현동, 영산과 계성 일대에서 출토된 무기류와 마구류, 생활도구류, 토기류, 장신구 등이 전시돼 있다. 지하에는 시청각실이 마련돼 있어 창녕군 관내의 문화유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시청각자료를 방영하고 있다.

박물관 전시실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와 조그마한 다리를 건너면 야외에 ‘계성 고분 이전복원관’이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계성리 고분군의 2-1호분을 이전 복원·전시해 놓은 곳이다. 대형 유리 돔 안에는 봉분과 함께 무덤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형태로 돼 있으며, 고분의 축조기법과 유물들이 출토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박물관 주변에는 창녕 석빙고(보물 제310호),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제33호), 술정리 동삼층석탑(국보 제34호), 술정리 서삼층석탑(보물 제520호) 등 놓치기 아까운 문화재가 많이 있다.


박영민 기자 < p1721@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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