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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전통과 역사] 임정·광복군 항공독립 전통, 정예 공군 창설로 이어져

입력 2021. 03. 04   16:56
업데이트 2021. 03. 04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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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선진 항공전력으로 독립전쟁 수행
 
선진 항공전력 활용 나선 임시정부
‘韓 최초 여성 조종사’ 권기옥 등 3인
일제 피해 中 운남항공학교서 훈련
 
1945년 광복군 비행대 편성
국내 지하군과 연락 임무 등 계획
1949년 대한민국 공군 정식 창설

 

1935년 대일선전비행계획에 참가한 동료들과 함께한 권기옥(왼쪽 둘째) 지사.
1935년 대일선전비행계획에 참가한 동료들과 함께한 권기옥(왼쪽 둘째) 지사.
운남육군항공학교에서 첫 단독비행에 성공한 권기옥 지사의 기념사진. 필자 제공
운남육군항공학교에서 첫 단독비행에 성공한 권기옥 지사의 기념사진. 필자 제공
여성 조종사로 독립전쟁을 펼친 권기옥 지사. 필자 제공
여성 조종사로 독립전쟁을 펼친 권기옥 지사. 필자 제공

일제강점기에도 한국의 하늘은 열렸다

1910년 대한제국을 불법적으로 병합한 일본은 식민통치를 합법화하고, 한국민의 민족적 자존심을 무너뜨리고자 당시 선진문물이었던 항공기를 이용했다. 항공기와 비행시범을 자랑함으로써 한·일 간의 문명 수준 차이를 강조한 것이다.

용산연병장을 최초의 비행장으로 활용한 일본은 식민정책 선전 활동으로 1913년 나라하라(奈良原)식 비행기를 이용한 비행대회를 열었다. 프랑스 놈에론(Gnome et Rhone)사의 50마력 엔진으로 자체 제작한 오토리(鳳)호를 일본인 비행사가 조종해 비행했고 ‘경성일보’ ‘매일신보’ 등 신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한편, 일본은 한국을 병합한 뒤 대륙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 각종 병참기지를 건설했다. 일본은 중일전쟁이 격화하자 항공력을 강화해 전력의 우위를 확보하고자 했다. 지상 병력이나 해군력을 통한 전쟁 수행과 함께 항공력은 광범위한 작전 범위를 가져 유용한 전력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항공력 활용을 위한 일본의 항공기 생산체계 건설은 군수산업 특성상 일본 본토에 한정됐지만, 전략적 차원에서 항공기지, 즉 비행장은 주로 전선과 가까운 지역에 건설됐다. 비행장 건설에는 식민통치 아래 있던 한국인이 동원돼 항공력 운용에 충원됐다. 1910년대 이후 선전 활동으로 비행기를 지켜봤고 한반도 내 18개 비행장 건설에 동원됐던 한국인은 항공력의 유용성을 깨닫게 됐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에 비행장이 많이 건설되면서 항공 분야 종사자가 늘어난 것은 항공력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이 높아진 배경이 됐다.


독립지사, 독립의 열망을 항공력으로 품다


당시 군벌 시대였던 중국은 경쟁적으로 군사력 확장을 추구했다. 특히, 항공력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 군벌들은 비행기를 구매하고 비행학교를 세워, 조종사를 양성하고자 했다. 이런 분위기는 신해혁명을 지도했던 쑨원(孫文)이 1913년 ‘항공구국(航空救國)’을 제창한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군벌은 일제 강점 이후 연해주와 만주에서 펼쳐진 독립군의 독립전쟁,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의 군사 활동, 광복군의 독립전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독립지사와 임정은 군벌과 활발하게 접촉했다. 독립활동을 전개하는 공간이 중국인 데다 중국의 군벌과 연대를 통해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일례로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에 우호적이었던 탕지야오 등 운남군벌은 임정 요원들을 운남육군항공학교에 입학시켜 조종사 교육을 수료하도록 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여러 이유로 항공력에 대해 높은 인식을 가진 한국민들은 독립전쟁에 선진 항공전력을 활용하려는 뜻을 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국군 역사에서 한국공군의 대모로 평가되는 권기옥 지사다. 평양에서 태어난 권 지사는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옥고를 치른 뒤 중국으로 망명해 임정의 추천으로 운남육군항공학교에 입교했다.


권기옥 지사, 편견을 깨고 하늘을 날다


임정은 독립활동 및 독립전쟁에 필요한 인원을 양성하기 위해 중국 정부와 협의해 위탁교육을 시행했다. 명목은 위탁교육이었지만, 중국인도 아니고 각지에 설립된 군사학교를 대부분 군벌 출신들이 해당 지역을 담당, 운영해 입학과 수료가 쉽지 않았다. 첫째, 상하이나 대도시를 중심으로 임정의 직책을 맡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남의 항공학교를 지원한 점은 권 지사가 현장에서의 독립활동에 적극적이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둘째, 일반 군사학교나 군관학교가 아닌 항공학교를 통해 조종사로 성장하고자 했던 점은 권 지사가 명확한 현실판단에 기반해 실천 가능하고 효율적인 독립전쟁 방법을 모색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일본군을 대상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려면 항공력이 효율적이라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셋째, 매우 높은 도전의식이다. 졸업은 고사하고 입학마저 어려운 항공학교를 임정 요인의 도움으로 추천장을 받아 어렵게 입학했다. 중국인도 수료하기 어려운 과정과 열악한 교육환경을 모두 극복하고 운남육군항공학교가 배출한 최초의 여성 조종사가 된 것에서 권 지사의 도전의식이 얼마나 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운남육군항공학교는 운남·귀주 총독이었던 탕지야오가 항공 관련 인원을 양성하기 위해 1922년 창설한 학교였다. 1903년 12월 17일, 라이트 형제가 플라이어 1호로 비행 시대를 시작한 이후 1905년 호광(湖廣)총독 장즈둥(張之洞)이 일본으로부터 산전식(山田式)기구를 구매해 정찰목적으로 활용하면서 중국의 항공시대가 시작됐다. 쑨원의 ‘항공구국’ 이념에 따라 1922년 겨울, 곤명의 남쪽 교외에 개교한 운남항공학교에 1기생으로 30명이 입학했는데 임정이 추천한 독립지사 권기옥, 이영무(李英茂), 장지일(張志日), 이춘(李春) 등 4명의 한국인도 포함됐다. 혹독한 훈련과정을 거쳐 1925년 2월 28일 배출된 1기 졸업생은 모두 26명이었는데 비행과 12명, 기계과 14명이었다. 이 가운데 한국인은 이춘을 제외한 3명이었다.

중국의 항공학교를 졸업했기에 권 지사는 중국 공군에 복무하며 항일전쟁 및 임정과 중국 정부 사이의 연락업무를 수행했다. 1926년 4월 20일에 펑위샹(馮玉祥)의 군대에 배속돼 항공처 부비행사로 근무했고 1927년 3월 국민정부의 동로군 항공사령부 1대 소속 비항원(飛航員)으로 근무했다. 이 시기 권 지사는 비행연습시간을 최대한 늘려 곡예, 편대, 정찰, 공중전, 폭격에 이르기까지 조종기술을 연마했다. 1935년 연초에는 항공위원회 부위원장 쑹메이링(宋美齡)이 권 지사에게 선전비행을 제안해 대일 선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기도 했다.


독립전쟁을 위해 공군 건설을 계획하다

1940년대 접어들면서 권 지사는 전면적으로 임정에 참여해 독립전쟁을 위한 업무를 수행했다. 우선 한국애국부인회 재건에 참여했고 1943년 임정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잠행관제’를 제정해 공군을 명시하면서 공군 건설계획을 세웠다. 이 시기 중국군에 소속됐던 최용덕·권기옥·김영재·김진일·손기종·염온동·이사영·이영무 등이 광복군 비행대 창설을 구상했다.

권 지사의 공군 건설계획은 최용덕의 구상과 연결돼 보다 구체적인 제안으로 완성됐다. 광복군의 공군 창설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1944년 세워졌다. 1944년 10월 12일, 임정 국무위원회 주석 김구 명의로 ‘공군설계위원회조례(空軍設計委員會條例)’ 추인을 요구했다. 김구는 이상과 같은 광복군의 확대 및 작전계획에 비행대를 만들어 작전할 것을 주장했다. 1945년 3월 최용덕이 기초하고 군무부가 임시의정원에 제출한 ‘한국광복군 건군 및 작전계획’은 광복군 비행대의 편성과 작전이란 결실을 맺었다. 최용덕, 권기옥 등 항공인들은 비행기는 미 공군에서 빌리고, 조종사는 중국 공군에 복무 중인 한국인 장교를 광복군으로 전환해 비행대를 편성한 뒤 광복군 총사령부와 국내 지하군과의 연락 임무를 맡도록 하고자 했다. 또한 중국을 중심으로 하던 군사계획을 확대해 태평양지역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면서 북상하는 미군과의 연합에 비중을 뒀다.


임정, 선진 공군을 양성해 독립전쟁을 수행하고자 하다

임정의 공군 건설계획은 광복 이후 공군 창설로 이어졌다. 권 지사는 귀국 이후 임정에서 의견을 같이했던 신익희의 추천으로 국회 국방위원회 여성 전문위원으로 활약하면서 국군의 초창기 정비와 체제 확립에 기여했다. 중국에서 함께 독립전쟁을 수행했던 최용덕은 국방부 차관으로, 이영무는 육군항공군사령관으로 활약했다. 권 지사는 6·25전쟁 기간뿐만 아니라 1955년까지 전문위원으로 국군의 국방체계 확립에 노력했다. 그 결실로 대한민국 공군은 1949년 10월 1일, 정식 창설됐으며 6·25에서 큰 전과를 거뒀다.

독립전쟁을 수행한 독립군은 일찍부터 항공에 대한 높은 인식을 가졌으며, 선진적인 항공전력을 갖춰 일제를 대상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다. 이런 독립군, 임정, 광복군의 항공독립전쟁 전통과 역사는 대한민국 공군으로 이어져 대한민국을 지키는 가장 높은 힘으로 성장했다.

국군역사기념관건립추진TF 김경록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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