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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전통과 역사] 3·1운동 열망…1920년 ‘독립전쟁 원년’ 선포 이어져

입력 2021. 02. 25   17:15
업데이트 2021. 02. 25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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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전쟁 원년 선포
 
근대화 노력 애국계몽운동으로 표출
독립전쟁과 분리 불구 밀접하게 전개
임시정부 수립·독립군 기반 조성
임정, 봉오동·청산리서 전투력 확인
 
독립의군 참모중장으로 국권침탈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장군.  국방일보 DB
독립의군 참모중장으로 국권침탈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장군. 국방일보 DB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동휘 국무총리.              출처=독립기념관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동휘 국무총리. 출처=독립기념관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전쟁

한국사에서 개항기는 격변기이자 조선 후기 사회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근대화의 물결을 혁신적으로 한국화하는 과제가 주어졌던 시기이다. 그럼에도 개항기 조선은 경제적 발전과 사회적 분화의 시대 상황을 망각하고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과정에서 복고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근대화와 개방의 역사적 시점에서 쇄국으로 정책을 펼쳐 내외부의 충돌과 갈등을 초래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조일수호조규,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 을미사변, 대한제국 수립, 러일전쟁, 을사늑약, 한일병합 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한국은 국권을 상실했다.

한국사에서 이러한 국권 상실을 초래하였던 개항기에 스스로 근대화를 추구하고,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여 독립을 보전해야 했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이 조령에서 강조했듯이 대한제국 이후 자주적이고 독립된 국가를 위한 노력이 경주됐다. 스스로 근대화하려는 노력은 애국계몽운동으로 표출됐으며, 일본을 비롯한 외세에 대해 반침략전쟁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했다.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전쟁은 국권 수호와 회복을 목표로 한 한민족의 노력이었으며, 근대적 자주 국가를 지향했다. 비록 방법론적 차이가 있더라도 동일한 목표를 지향했던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전쟁은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전쟁은 분리돼 전개됐지만, 매우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안중근 의사다. 안 의사는 국내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다 러시아령에서 한인촌을 근거로 애국계몽운동을 펼치고 독립의군을 결합해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했다. 또한, 대한독립의군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사살하는 의거를 감행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 1909년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이후 1910년대 만주지역에서 많은 독립지사들이 독립단체를 결성하고, 한인촌을 바탕으로 독립기지를 건설해 체계적으로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보다 조직화되는 경향을 보였으며, 여러 독립단체와 독립군 부대를 연합해 국내진공작전을 활발히 전개했다. 3·1운동의 민족적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마침내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 일본군을 대상으로 한 독립전쟁이란 성격을 명확히 했다.


‘3·1운동’ 한민족,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100년여 전 한민족은 대한독립만세를 당당하게 외치고 전 세계에 독립의 정당성을 알렸다. 청일전쟁을 통해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강점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한반도의 식민지화를 추진했다. 한민족은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일본의 강압적 침입에 대응하고,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돼 개혁정치를 추진했지만, 일본의 방해와 국권침탈에 이해관계가 맞았던 열강에 의해 결국 1910년 국권을 침탈당했다. 침탈당한 국권을 회복하고자 민족적 대응으로 일어난 3·1운동은 독립에 대한 한민족의 열망을 반영하며, 국제사회에 대한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한민족은 3·1운동을 통해 한민족의 독립 열망을 확인하고, 정당한 정부수립의 필요성을 재확인함으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의병전쟁을 수행하던 의병은 대한제국 군대해산 이후 독립군으로 보다 체계화됐으며, 한민족의 열망으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통해 정당한 대한민국의 군대로서 일본군과 독립전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대한민국의 군대, 독립군

국권을 침탈당한 한국민이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한민족을 대표하는 정부 조직과 실질적인 군대가 필요했다. 이에 3·1운동 이후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역사적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상하이의 임시정부 이외에 여러 임시정부가 수립됐는데 이를 상하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합하고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보강한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제정함으로써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을 국호로 정하고, ‘민주공화국’의 민주적 3권분립 정치체제를 확립했다.

임시정부 수립은 국권을 강탈당한 한국민에게 독립의 열망을 표출할 수 있는 자부심을 심어주었으며, 지역 기반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독립군에게 독립전쟁의 국제적 기반을 조성해 줬다. 임시정부는 통합 이후 독립군을 규합해 독립전쟁을 추진했다. 그 첫걸음은 임시정부의 군사편제를 갖추는 것이었으며, 뒤이어 기존 독립군을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임시정부는 ‘임시헌법’과 ‘관제’를 반포하고, 구체적인 군제를 정립하고자 했다.


독립전쟁의 원년 선포와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 반포

1920년 1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무원 포고를 통해 대한민국 2년(1920년)을 “2000만 대한민족이 일심일체가 되어 죽느냐 자유냐의 독립대전쟁의 원년”이라 선포했다. 뒤이어 2월 26일, 임시정부 의정원은 ‘시정방침’을 의결해 독립전쟁 개전을 공식 방침으로 정하고, 개전 준비에 역량을 집중했다.

그 일환으로 3월 16일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大韓民國陸軍臨時軍制)’를 반포해 대한민국의 국군을 편성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3편 13장 55조로 구성된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는 육군의 구조, 기관, 계급, 직무 등 군사체계 전반을 규정했다. 대한제국 군인 출신으로 독립군을 이끌었던 이동휘가 통합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취임하면서 준비된 임시군제는 대한제국의 군제와 유사하며, 일본군을 적으로 해 일본군의 편제를 고려했다. 또한, 1919년에서 1920년으로 전환되면서 현실적인 군사 상황을 고려해 임시정부와 독립군과의 관계를 규정했다. 임시정부 수립 이후 독립군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공식적인 정규군으로 편제하려는 노력은 독립전쟁에 대한 당시 한국민의 열망을 반영한다.


당당히 독립전쟁의 길을 열다

국권 강탈 이후 10년여 동안 한국민은 일본을 용서하지 않았다. 의병전쟁의 전통을 이어 독립군을 구성하고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국권 강탈의 원흉을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는 사할린에서 사살했으며, 많은 독립지사가 만주에서 한인촌을 건설하고 군사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했다. 3·1운동은 한민족의 독립 열의를 전 세계에 알렸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독립군의 독립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불안정한 국제정세를 독립전쟁의 기회로 활용했다. 중국 영토에서 군대 창설이 불가능했던 현실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전략적 지리를 선점하고 한인촌을 중심으로 독립 역량을 배양한 독립군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편제해 일본과 독립전쟁을 하고자 했다.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함으로써 독립전쟁이 정당하고 의로운 전쟁임을 표방했다. 독립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대로 당당하게 일본군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펼쳐 독립의 길을 열어갔다.

독립군은 독립전쟁을 통해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라는 역사적 전과를 거뒀다. 독립군은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체계화와 독립기지 건설, 군사교육 실시 등을 통해 독립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전투력을 확보함으로써 마침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실전을 통해 전투력을 확인한 것이다.

국군역사기념관건립추진TF 김경록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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