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전쟁과 인간

“나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였다”

입력 2020. 11. 25   17:11
업데이트 2020. 11. 25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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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강요한 딜레마 윌리엄 스타이런 『소피의 선택』 
 
아우슈비츠서 살아남은 여성 삶 담아
가혹한 선택 강요한 전쟁 폭력성 부각
세 인물 통해 ‘순백의 피해자’ 환상 해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소피의 선택’(1982) 스틸컷. 필자 제공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소피의 선택’(1982) 스틸컷. 필자 제공
『소피의 선택』

민음사·2008
『소피의 선택』 민음사·2008
『보이는 어둠』

문학동네·2002
『보이는 어둠』 문학동네·2002

전쟁은 인간에게 가혹한 선택을 요구한다. 어느 것을 택하더라도 상처를 피할 수 없다. 미국 작가 윌리엄 스타이런의 『소피의 선택』은 전쟁이라는 극한상황이 강요한 딜레마와 후유증을 강렬하게 그린 소설로 꼽힌다.

소설의 주인공 미국 남부 출신 청년 스팅고는 1947년, 꿈에 그리던 뉴욕에 입성한다. 뉴욕에서 스팅고는 출판사 잡일을 하면서 조금씩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가난한 농촌 출신인 그가 뉴욕에 살 수 있었던 것은 증조할아버지가 남긴 유산 덕분이었다. 스팅고는 남부 출신이면서도 노예 제도에 반대했고 흑인 반란 지도자 터너의 생애를 소설로 쓰고 있었다(실제로 윌리엄 스타이런은 『냇 터너의 고백』이라는 소설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스팅고는 바로 작가의 분신인 셈이다). 그가 뉴욕에 입성할 수 있었던 건 증조할아버지가 어린 노예 아리스테를 팔아서 마련한 485달러 덕분이었다. 증조할아버지의 돈은 시간이 흐르면서 가치가 불어났고, 그 유산으로 스팅고는 뉴욕에 자리를 잡게 됐다. 스팅고는 돈에 얽힌 사연을 알고 있었지만, 좋은 작가가 돼 돈에 얽힌 부채감을 덜고자 했다.

스팅고가 사는 아파트에는 이상한 이웃이 살고 있었다. 유대인 남성 네이선과 폴란드 출신의 아름다운 여성 소피였다. 두 사람은 밤마다 심각하게 다퉜다. 흐느끼는 소리와 욕설이 들리고 가구가 부서지는 소리까지 들렸지만, 이내 그들은 화해하고 요란하게 잠자리를 가졌다. 스팅고는 이 커플에 흥미를 느꼈고 그들은 곧 가까운 사이가 된다. 스팅고는 소피에게 한눈에 반했고, 지적인 네이선에게도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소피의 억눌린 과거가 밝혀질수록 세 사람의 관계는 점차 틀어지게 된다. 전쟁의 기억은 집요하고 복잡했다. 소피는 처절한 피해자였고, 냉혹한 가해자이기도 했다.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했을 때 대학교수인 소피의 아버지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소피는 아버지의 제자인 남편에게도 신물을 느꼈고, 나치와 싸우는 레지스탕스 대원과 불륜에 빠진다. 소피의 애인은 곧 독일군에 잡혀 처형됐고, 소피의 가족도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게 된다. 어린 자식들과 함께 수용소로 끌려가던 소피를 눈여겨본 독일군 장교는 소피에게 추파를 던지다가 두 아이 중 한 아이를 고르라고 강요한다. 가스실로 보낼 아이를 선택하지 않으면 모두 가스실에 보낸다는 협박에 직면한 소피는 망설이다가 어린 딸을 선택한다. 소피는 가스실로 끌려가는 딸의 비명을 들으면서 오열한다.

소피는 아들이라도 살리고자 수용소장 헤스를 성적으로 유혹했고 수용소 업무에 협조한다. 그러나 끝내 아들의 생사를 알지 못한 채 종전을 맞이한다. 가족을 모두 잃고, 미국으로 이주한 소피는 유대인 과학자 네이선을 만나서 함께 살게 됐지만, 네이선도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지 못했다. 유대인인 네이선은 심각한 조울증에 시달렸고, 마약까지 복용하고 있었다. 전쟁은 끝났고 나치는 몰락했지만, 유럽과 미국에서 유대인 차별 정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네이선은 유대인 학살이 단지 나치의 의지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었으며 많은 사람이 나치의 학살에 협력했다는 사실에 절망했고, 자신의 핏줄을 저주했다.

네이선과 소피는 틈만 나면 서로의 과거를 들춰냈고, 그럴 때마다 전쟁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들은 서로를 욕하고, 저주하면서 살아있다는 사실을 폭력적으로 확인했다. 그들은 서로를 학대하면서 전쟁의 기억과 싸웠던 것이다. 그것이 스팅고가 밤마다 들었던 격렬한 소음의 원인이었다. 스팅고는 소피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자신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소피는 스팅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행복’하거나 ‘안정’될수록 기억은 집요하게 되살아났고, 죄책감은 더욱 깊어졌다. 결국 소피는 자신을 학대하던 네이선과 함께 자살을 선택한다.

『소피의 선택』은 1979년, 출간되자마자 엄청난 판매 부수를 올렸고,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대부분 홀로코스트 서사는 나치의 범죄와 피해자 유대인이라는 선명한 구도로 전개되었지만, 이 소설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비유대인 여성의 시선으로 홀로코스트를 그렸다는 점에서 화제가 됐다. 특히 폴란드에서는 소피의 아버지가 나치협력자로 그려진 것과 소피가 딸을 죽음으로 내몰고 독일군 장교를 유혹하는 설정 탓에 판매금지 처분이 내려지기도했다.

소설 속 세 인물이 처한 아이러니는 독자로 하여금 가해자가 명확할수록 피해자의 선함이 부각되는 착시에서 벗어나게 한다. 소피는 잔혹한 학살의 피해자였지만, 결과적으로 살아남고자 나치에 협력한 전범(가해자)이었다. 네이선은 유대인이 아닌 소피를 괴롭히면서 자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인종주의자들과 비슷한 가해자가 된다. 스팅고는 가장 이성적인 인물로 묘사되지만, 그의 안정된 삶은 흑인 노예를 팔아서 축적한 증조할아버지의 재산 덕분이었다. 윌리엄 스타이런은 세 인물들을 교차시키면서 사람들이 지닌 ‘순백의 피해자’라는 판타지를 해체한다. 그리고 가혹한 선택을 강요하는 전쟁의 폭력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소피의 선택』을 출간한 이후 윌리엄 스타이런은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우울증 보고서 『보이는 어둠』(1985)을 발표했다. 이 책에서 작가는 ‘불충분한 애도(Incomplete Mourning)’에 대해 말한다. 슬픔을 해소하는 과정을 충분히 겪지 못한 사람은 내면에 분노와 죄책감을 쌓아두게 되고, 그것은 곧 자기 파괴의 씨앗이 된다고 말이다. 작가 개인의 경험을 담은 글이지만, 마치 이 문장은 ‘소피’와 ‘네이선’의 내면을 대변하는 것만 같다. “나는 자기 살해자인 동시에 희생자였으며, 고독한 배우인 동시에 외로운 관객이었다.” 사진=필자 제공

<이정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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