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는 머리가 아니라 발로 글을 쓴다고들 한다. 책상에 앉아 우아하게 글을 쓰며 살 것 같지만, 정작 대부분의 시간을 길 위에서 보내기 때문이다. 사주에 역마살이 들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전국 방방곡곡 안 가본 곳이 없다. 여행도 하고 돈도 버니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일이 결코 여행이 될 수 없다는 건 한 번만 경험해 보면 금방 알게 된다. 그래도 가끔, 이 길 위의 인생이 나름 괜찮다고 느끼는 순간은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무언가를 만났을 때다.
갈대숲의 바다, 넓은 들과 산을 모두 품은 전남 강진은 ‘상다리가 휘어지는 한정식’이 아니어도 풍경만으로 배가 부른 땅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가 “남한 답사 1번지”라고 했을 만큼 문화유적지 등 볼거리도 많다. 그중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년간 귀양살이를 하며 지냈던 ‘다산초당’의 고즈넉한 정취는 여행의 백미다. 그런데, 취재를 위해 다시 찾은 강진의 한 골목에서 다른 지역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돌담을 발견했다. 돌을 비스듬하게 생선 비늘 모양으로 쌓았는데, 네덜란드의 돌담 쌓는 방식과 닮았다고 한다. 강진에서 만난 네덜란드식 돌담, 그 인연의 시작은 다산보다 먼저 이곳에서 살다 떠난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이었다.
1653년 일본으로 가던 네덜란드 상선이 태풍에 난파돼 제주도에 표류했고 살아남은 33명의 선원 중 한 명이 하멜이다. 그가 13년간의 조선 생활을 기록한 『하멜표류기』는 회사에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 증거로 썼다는데, 당시 조선을 서양에 알린 최초의 기록이 됐다.
하멜과 선원들은 서울로 이송돼 훈련도감에서 병사로 생활했는데, 강진 병영성에서도 7년을 노역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하멜 일행 중 몇몇은 강진에서 인연을 만나 결혼,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그 후손들이 현재까지 살고 있다고 한다.
하멜 이전에도 먼 나라에서 온 이들은 많았다. 가락국 김수로왕과 혼인한 인도 공주 허황옥의 설화부터 베트남 왕자로 고려에 귀화해 화산 이씨 시조가 된 이용상, 조선에 귀화해 박연이라는 이름의 무신으로 살았던 네덜란드인 벨테브레 등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우리나라와 인연을 맺고 살았다. 그리고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우리 곁에는 수많은 허황옥과 하멜과 박연 들이 가족으로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다.
외국인 250만 시대, 군대도 다문화 시대를 맞고 있다. 2010년 병역법이 개정되면서 인종과 피부색에 상관없이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병역의무를 다하게 됐다. 최근 다문화 가정 2세들의 입대가 본격화되면서 10년 후에는 1만 명이 넘을 것이라고 한다. 여전히 피부색과 외모, 다른 문화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마음을 열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면, 다른 언어와 문화를 경험한 다문화 장병들은 군 문화를 다양하게 만드는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차이가 차별의 이유가 될 수 없고, 다름은 틀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차이와 다름이 있어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더 크고 넓고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낼 수 있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정현종의 시 ‘방문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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