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완결 병영칼럼

[정은정 병영칼럼] 오래된 학교

입력 2020. 11. 16   16:38
업데이트 2020. 11. 16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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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은 정 농촌사회학 연구자·작가
정 은 정 농촌사회학 연구자·작가


돌아가신 큰아버지는 동네에서 상일꾼이셨다. 고향 사람들은 농사만 지어 먹고살기 어려우니 다들 도시로 떠났고, 이래저래 동네 대소사를 챙기는 일을 하실 수밖에 없었다.

큰아버지가 상일꾼이 된 데는 운전기술도 한몫했다. 큰아버지는 1950년대 말에 군대에서 운전을 배우셨다. 지금은 생활기술에 가까운 기술이 운전이지만 그때는 운전만 할 줄 알면 가족들 건사에 무리가 없던 때였다고 한다.

그렇게 배운 운전 덕분에 동네에 아픈 사람이 생기면 읍내 병원까지 가장 빨리 내달릴 수 있었고, 동네 일에 트럭을 몰고 다니며 일을 척척 해내셨던 것이다.

1950∼1960년대에 군대에 다녀온 고령 농민들 중에는 군대에서 한글을 뗀 분들이 많다. 1981년 정치학회보에 실린 ‘군대교육과 국가발전’이라는 글을 보면 ‘육군공민교육’을 통해 1954년까지 1만2489명의 군인이 국민(초등)학교 과정을, 9576명의 군인이 중등학교 과정을 배웠다고 한다. 일제 식민지배와 전쟁 직후의 가난한 시대, 농사 짓다 입대해서 배도 많이 곯았지만 그래도 군대에서 한글과 기초 산수를 배워 문해 과정을 통과한 농민이 많았다는 것이다. 당시 드물게 해외연수와 유학의 경험도 군대를 통해서 많이 이뤄졌다.

1960년대 말까지 국민 다수가 농촌에서 살았고 또 주로 농업에 종사했다. 지금은 대학교에 다니다 입대하거나 도시에서 사회생활을 하다 입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때만 해도 군인들 다수가 농민이었다. 이들은 제대하면 다시 농촌으로 돌아갈 사람들이었다. 원조경제에 의지해 겨우겨우 나라를 재건하던 때 이 농민들에게 한글과 산수를 가르치고, 여기에 벼와 밭농사에만 매달리지 말고 좀 더 잘살아 보라며 가르친 농업기술이 바로 축산이다.

1961년 당시 육군본부에서 발행한

『국민독본-농업축산 기술강좌』 편은 양돈·양계·양봉·양잠 등의 최신 기술을 담고 있다. ‘독본’은 일반인들에게 전문 지식을 알려주기 위한 입문서, 혹은 해설서를 뜻한다. 나도 이 독본 중에서 ‘양계 편’을 갖고 있다. 이 독본의 특징은 그림이 많다는 것이다. 닭장의 설계도는 물론 닭의 품종과 기르는 방법 등을 글과 그림으로 적절하게 설명한다. 문해 교육이 이뤄졌다 해도 글보다는 그림으로 설명해야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림은 미대생 출신의 군인이 정성스럽게 펜으로 꾹꾹 눌러 그린 느낌이고, 언뜻 보면 전래동화의 삽화 같아서 정겨운 느낌도 든다.

실제로 원로 축산농민 중에는 군대에서 배운 양돈과 양계 기술로 돼지와 닭을 쳐서 부를 일군 이들이 있다. 농업고등학교나 농업대학에 가서 배울 수 있을 만큼 형편이 좋은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런 때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 ‘국민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군대에 들어가 처음으로 책을 통해 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당시 축산업은 농가에서 자가소비용으로 한두 마리 기르는 수준이었고, 축산을 전업으로 삼으려면 기술 훈련이 필요했는데 그 선진 기술의 입문을 군대에서 한 셈이다.

세월이 지나 이제 군대에서 더 이상 농업기술은 가르치지 않는다. 운전도 웬만하면 다 면허를 소지하고 있으니 따로 가르치지 않는다. 문해 교육이 필요한 시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대입검정고시 과정이 운영돼 누군가에겐 고등학교 졸업 자격이 주어지고 삶의 기회가 열린다. 군대는 이 사회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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