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한국전쟁 70주년, 대중가요로 본 6.25전쟁

포성 멎었지만… 어머니의 근심은 어찌 멎으랴

입력 2020. 11. 06   16:09
업데이트 2020. 11. 06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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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1954 비 나리는 삼랑진
작사 반야월 /작곡 이재호 /노래 박재홍 


정전협정 1년 후에 나온 노래
군 입대하는 아들 심경 가사로 옮겨
‘소양강 처녀’의 반야월 작사 눈길


<비 나리는 삼랑진>은 1954년 서라벌레코드 음반으로 박재홍이 부른 노래다. 노래의 배경은 경부선 삼랑진역이고, 노래 속의 주인공은 어머니와 이별을 하고 군대에 입대하기 위해 고향을 떠난다. 6·25전쟁의 포성을 멎게한 정전협정 체결 1년 뒤의 대한민국 사회적 서정이다. 경부선 상행선 기차를 타고 대전역을 향했으리라. 그곳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논산훈련소로 지향했을 노래 속의 화자 복돌이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우리나라를 포성과 매캐한 화약 연기로 휘감고, 17만여 명의 피 끓는 젊은이들을 전사·실종의 도가니로 몰고 간 6·25전쟁이 멈춘 시기, 아들을 군대 보내는 어머니의 근심 어린 눈빛이 눈에 선하다. 노래 제목의 지명 삼랑진은 1928년까지는 삼랑진면이 아니라 하동면(下東面)이었다.

이 노래의 배경인 삼랑진(三浪津)은 밀양시 동남부에 위치 하고 있다. 동쪽으로 금오산(760m)·천태산(630m)자락이 양산시 원동면과 경계를 이루고, 남쪽으로 낙동강 건너 김해시 생림면과 마주하고 있다. 서쪽으로 상남면과 밀양강 하류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북쪽으로 임천터널을 경계로 남포동·만어산(670m)·구천산(620m)을 경계로 단장면과 접하고 있다. 삼랑진(三浪津, 3물결 나루터)의 이름은 밀양에서 유입되는 응천강 물결·낙동강 본류 물결·바닷물이 밀물 만조로 인해 이 동네 앞까지 차오를 때의 바다 물결 등 3물결(三浪)이 만나서 큰 물결로 일렁거리는 나루터라는 데서 유래됐다. 그래서 삼랑진인데, 많은 사람들은 ‘삼량진’으로 알고 있기도 하다.

이곳은 예로부터 물길의 요충지로 조선 후기 낙동강의 가장 큰 포구 중 하나였다. 1765년(영조41)에는 삼랑창(三浪倉)이 설치돼 밀양·현풍·창녕·영산·김해·양산 등 여섯 고을의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를 운송하던 곳이다. 1928년 하동면을 삼랑진면으로 바꾸었으며, 1963년 읍으로 승격됐다. 이곳에 삼랑진역 정거장이 들어선 시기는 1905년이다. 삼랑진읍 천태로 72, 2등급 역으로 경부선·경전선 무궁화호 열차가 정차한다. <비 나리는 삼랑진> 노래 속의 복돌이가 어머니와 이별을 하던 1954년은 이 역이 생긴 지 49년이 된 시기다. 역은 미전역과 원동역 사이에 있으며, 1905년 1월 1일 경부선 철길이 개통되면서 보통역으로 운영됐다. 지금은 경부선 44편(상·하행 각 22편) 무궁화호가 정차하며, 이 중 왕복 5편(상·하행 5편)은 경전선(경상도 삼랑진~전라도 송정역)으로 운행된다.

삼랑진읍은 인구 8만여 명이 상주하며, 법정리 13·행정리 31·반이 110개다. <비 나리는 삼랑진> 속의 복돌이 어머니는 50리 길을 아들을 따라 나와서 허리춤에 차는 두루주머니, 염낭줌치를 끼워주며 무명수건으로 눈물을 닦는다. 복돌이의 본가(本家)는 어느 마을이었을까? 송지리·검세리·안태리·행곡리·율동리·우곡리·삼랑리·미전리·용전리·임천리·숭진리·청학리·용성리 중에서. 노래 속의 옥분이와 복돌이는 다시 만났을까? 삼랑진역이 눈에 어린다.

이 노래 작사가 반야월은 1917년 진해에서 태어나 진해농산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태평레코드 주최로 김천에서 개최한 전국신인가수 선발대회에 입상해 가수로 데뷔했다. 그는 해방 후 <울고 넘는 박달재>, <단장의 미아리고개>, <소양강 처녀>, <유정천리> 등 수천 곡을 작사했다. 그가 사용한 예명는 진방남·반야월·추미림·박남포·허구 등 많다. 아호와 필명을 503개나 사용한 추사 김정희(1786~1856)를 모방한 것일까? 아니다. 해방정국기와 6·25전쟁기와 맞물린 좌우 이념대립과 정부 당국 감시의 눈길과 연계된 경향(傾向)이다. 가수로 데뷔한 이듬해인 1940년 진방남이란 예명으로 활동하면서 <불효자는 웁니다>를 불러 히트시켰고,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반야월로 이름을 바꿔 작사가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박시춘·이난영과 함께 한국가요계 3대 보물로 불리며, 1942년 <넋두리 이십년>의 가사를 처음으로 만든 이후 한국 가요사상 가장 많은 5000여 곡을 남기고, 2012년 향년 95세의 일기를 마쳤다. 고인은 별세 4일 전까지 작품 활동을 한 한국가요계의 전설이다.

이 노래 작곡가 이재호의 본명은 이삼동, 1919년 진주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 형에게 트럼펫을 배웠고, 진주고등보통학교(진주고)를 다니다 중퇴하고 일본 도쿄고등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귀국 후 처음에는 콜롬비아레코드에서 무적인이라는 필명으로 작사·작곡을 해오다가 곧 태평레코드로 옮겨 이재호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했다. 그는 백년설과의 콤비로 1938년 <북방여로>, 1940년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산팔자 물팔자>, <고향설>, <어머님 사랑> 등 히트곡을 불렀다. 이어 <불효자는 웁니다>, <망향초 사랑> 등으로 인기를 끌고, 태평연주단을 이끌고 국내와 만주 일대까지 순회공연하며 이름을 떨쳤다. 1941년에는 <복지만리>, <대지의 항구>, 1942년 <꽃마차>, <사랑>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이후 결핵 투병을 했으며, 광복 후에는 잠시 고향 진주에서 모교인 진주중학교 음악교사를 지낸다. 이때 작곡가 이봉조(1931~1987)가 제자였다. 이봉조는 남해에서 출생해 진주에서 공부를 했다. 6·25전쟁 이후 다시 작곡 활동을 시작했으며, <물레방아 도는 내력>, <단장의 미아리고개>, <울어라 기타줄> 등의 히트곡을 내놓았고, 1960년 7월 3일 지병인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동양의 슈베르트’라는 애칭은 41세로 타계한 그에게 너무나 가혹한 빛을 발하는 절찬(絶讚)의 별명이다.

가수 박재홍은 1924년 시흥 출생, 은행원에서 가수로 전향해 활동하다가 1989년 66세로 저승의 별이 됐다. 1947년 오케레코드 주최 신인콩쿠르에서 입상해 데뷔했고, 1948년 <눈물의 오리정>을 옥두옥(1927~)과 듀엣으로 취입한 후, <불사른 일기장>, <자명고 사랑>, <제물포 아가씨>, <마음의 사랑>, <울고 넘는 박달재> 등을 남겼다. 6·25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피난해 쇼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고, 해방 직후에는 부산의 미도파레코드와 대구의 서라벌레코드에 전속으로 있으면서 <경상도 아가씨·비 내리는 삼랑진·번지 없는 항구> 등을 취입했다. 1960년대 초, 오아시스쇼단을 창설해 단장을 역임했다. 이처럼 유행가는 시대를 아물고, 작사·작곡·가수 3요소가 시대와 조화를 이뤄야 100년 애창곡이 된다.  <유차영 한국콜마 여주아카데미 운영원장/예비역 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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