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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어 죽은… 굶주림 해결하려던 식물학자 그가 찾은 씨앗은 인류의 희망이었다

입력 2020. 11. 04   17:05
업데이트 2020. 11. 04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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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미래를 대비한 위대한 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삶과 비극적 최후


1920년대부터 전 세계 다니며
각 지역의 식물 씨앗들을 수집
스탈린의 정치적 희생양 되어
감옥에서 비극적으로 생 마감
38만 개 종자 보존 연구소 세워
식물 다양성 지켜 식량위기 대비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바빌로프 
                             출처=위키피디아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바빌로프 출처=위키피디아
바빌로프의 삶과 연구를 다룬 저서
『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게리 폴 나브한, 강경이 옮김, 아카이브, 2010
바빌로프의 삶과 연구를 다룬 저서 『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게리 폴 나브한, 강경이 옮김, 아카이브, 2010
바빌로프의 전기
피터 프링글, 서승순 옮김, 아카이브, 2011
바빌로프의 전기 피터 프링글, 서승순 옮김, 아카이브, 2011

1941년 독일군이 옛 소련 레닌그라드로 접근하자 스탈린은 에르미타시 박물관에 소장된 200만 점의 미술품들을 후방으로 옮기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독일군이 노린 것은 에르미타시 박물관이 아니라 다른 박물관이었다. 바로 종자연구소였다. 종자연구소에는 러시아의 세계적인 식물학자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바빌로프(1887~1943)가 1894년부터 수집한 38만 개가 넘는 발아 가능한 씨앗과 뿌리, 열매가 보관돼 있었다. 소련을 점령해 게르만족의 ‘레벤스라움(Lebensraum·생활권)’을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던 히틀러는 유전학에 관심이 많았다. 게르만족의 생활권을 유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을 비롯한 생태 자료였다. 레닌그라드는 900일의 포위에도 항전을 포기하지 않았고 종자연구소도 보존됐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바빌로프가 유전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시기였다. 당시 러시아 북부 농지에 퍼진 ‘흰가루병’으로 농작물 작황이 크게 나빠졌고 전선의 병사들도 굶주리게 됐다. 엄청난 사상자 발생과 식량 부족으로 러시아 국민의 민심은 극도로 악화했고, 이것은 1917년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페트롭스키 농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바빌로프는 흰가루병에 강한 밀 종자를 찾는 데 성공했고 서른 살의 나이에 농업학교 교수로 임용됐다.

바빌로프는 1920년대부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각 지역의 풍토에 적응한 식물들의 씨앗을 수집했다. 그는 파미르 고원, 남미의 열대우림, 사막과 고원지대까지 샅샅이 조사하면서 각 지역에서 자라는 생물들과 음식 문화를 조사했다. 그의 발길은 1920년대에 식민지 조선까지 닿았다. 바빌로프의 자료에는 한국의 인삼과 콩에 관한 언급도 담겨 있다. 또한 수분이 없는 모래언덕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호피족과 나바호족, 변화하는 기후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려고 여러 작물을 돌려 심는 농부들의 지혜를 과학적인 자료로 남겼다. 종자연구소를 세운 바빌로프는 천재지변이나 큰 전쟁 이후에도 살아남으려면 식량의 안정적 확보가 최우선이라는 생각을 지녔다. 세계의 과학자들과 지식을 공유해 미래의 식량 위기에 대비할 ‘세계종자연구소’를 세우는 것이 바빌로프의 원대한 꿈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집권하자 모든 것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형질이 유전된다는 생물학의 기본지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귀족의 자녀가 부모의 계급을 그대로 물려받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스탈린의 이런 기질에 정확히 맞는 생물학자가 등장했다. 트로핌 리센코(1898~1976)였다. 리센코는 어떤 종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자라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라마르크적인 ‘획득형질 유전’을 주장했다. 이런 ‘리센코주의’에 스탈린은 관심을 보였다.

바빌로프는 유전학에서 환경적 요인이 중요하다고 인정하면서도 리센코의 주장이 실제 종자연구에 적용되려면 훨씬 더 많은 자료와 시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중요한 것은 리센코의 주장은 ‘과학’이 아니라 ‘계급의식’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스탈린의 총애를 받은 리센코가 학계를 장악하자 바빌로프는 1937년 모스크바에서 국제유전학회를 열어 리센코주의의 오류를 입증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학문적인 논쟁과 자료의 과학적인 검토조차 반역 행위로 받아들인 스탈린은 학회를 취소해 버리고 바빌로프를 체포했다. 자료 수집을 핑계로 해외에서 스파이 행위를 했다는 죄목이었다.

당시 소련에서는 농촌 지역의 식량을 징발해 도시 노동자에게 공급하는 과정에서 식량 부족이 만성화됐고 리센코의 학문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스탈린은 리센코를 옹호했고 바빌로프와 동료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체포된 바빌로프는 400여 회에 이르는 심문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기록 조작과 혹독한 고문이 자행됐지만, 바빌로프는 자신의 과학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국제사회의 비판이 높아지자 부담을 느낀 스탈린은 바빌로프의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바빌로프를 사라토프 지역의 감옥에 가뒀다. 그곳에 갇힌 바빌로프는 전쟁 중인 1943년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인류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려던 과학자가 굶어 죽은, 스탈린 시대가 낳은 잔혹한 아이러니였다.

바빌로프의 동료들도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종자연구소를 지키면서 다수가 사망했다. 반면 리센코는 자신의 학문적 승리를 선언하면서 승승장구했고 소련의 과학계에서는 바빌로프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지됐다. 미국의 진화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는 바빌로프의 사망을 애도하면서 ‘과학역사 최악의 사기극’이라고 언급했다. 스탈린이 사망한 후 정치적으로 복권되면서 바빌로프의 업적은 다시 빛을 보게 됐다. 바빌로프의 연구소는 ‘N. I 바빌로프 식물산업연구소’라는 이름으로 개칭됐다. 1987년에는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도 열렸다.

바빌로프의 연구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바로 ‘다양성의 가치 존중’이다. 다양성이 소멸한 세계는 작은 타격으로도 큰 위기를 겪게 된다. 이것은 식물과 동물만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적용되는 진리다. 오늘날 기업들은 더 많은 수익을 내려고 다양성을 무시하면서 유전자 변형 곡물을 팔고 있다. 또한 잦은 기후변화로 인한 식량 가격 폭등으로 인류의 미래는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도 개발논리로 다양성을 무시하면서 숲을 파괴한 결과이지 않은가? 지금도 바빌로프의 연구를 이어받은 학자들은 전 세계 식물의 유전적 다양성을 지키고 있다. 2008년 노르웨이에 들어선 스발바르 국제 종자 저장고가 대표적 사례로, 전 세계 모든 재래식물의 종자가 영하 18도 상태에서 보존된 ‘현대판 노아의 방주’로 꼽힌다. ‘코로나 시대’인 2020년, ‘유엔세계식량계획’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세계 교역의 감소와 낙후된 지역의 식량 위기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노벨위원회는 선정 이유로 “국제적 연대와 다자간 협력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밝혔다. 이것은 인류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바빌로프의 연구 정신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정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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