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전형적인 경상도 사람들이다. 나 또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표현도 부끄러워서 매년 어버이날에도 영혼 없이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게 고작이었다. 무뚝뚝하기가 마치 가을날의 쓸쓸한 바람과도 같았던 우리 가족들에게 어느 날 우연히 감사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군단에서 추진한 ‘추석맞이 사랑하는 가족에게 100감사편지 나누기’ 캠페인이었다.
맞벌이였던 부모님은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그저 평범한 가정에서 큰 굴곡 없이 자랐지만,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가끔 못된 말을 내뱉곤 했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그때 했던 말들이 부모님의 마음에 비수를 꽂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죄송스러운 마음에 차마 “그때 그런 말 해서 미안해, 엄마 아빠는 정말 최고의 부모님이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쉽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캠페인을 계기로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감사한 내용을 하나하나 적다 보니 정말 감사한 일들이 너무 많았고,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것은 모두 부모님의 덕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부모님이 내게 했던 모든 것들이 하나도 당연한 것이 없었고, 나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28년 만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100감사편지를 작성하는 동안 몇 번이나 울컥했는지 모른다. 눈물 콧물 쏟아가며 한 자 한 자 쓸 때마다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하는 마음은 더욱 커졌고, 존경하는 마음은 더욱 깊어만 갔다. 다 쓴 후에도 “부끄러운데 보낼까 말까”하고 잠시 고민했지만, ‘이번 기회가 아니면 내 맘을 전할 수 있을까? 부모님도 편지를 보면 분명히 좋아하실거야’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내서 소포를 집으로 보냈다.
양양에서 대구집까지 택배가 배달되는 동안 내 마음은 콩닥콩닥 떨렸다. 드디어 100감사편지를 받아 본 엄마는 “어떻게 이런 일까지 다 기억해? 이것까지 기억할지 몰랐어. 너무 감동했고 우리 딸 대견하다”며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시곤, 갑자기 “이건 진짜 코팅해서 액자에 걸어둬야지”라고 하길래 그저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코팅해서 대단한 우승 트로피처럼 잘 보이는 거실 탁자에 올려두었다고 한다.
이런 엄마와는 달리 별 반응이 없는 아빠가 서운하게만 느껴져 직접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아빠! 사랑하는 딸이 보낸 100감사편지를 본 소감이 어때요?” 아이처럼 툴툴거리는 내 전화에 아빠는 “허허, 그 자식”이라고 말하며 그저 소리내어 웃기만 했다. 평소 아빠의 무뚝뚝한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엄마와 함께 편지를 읽으며 아빠가 얼마나 감동 받았고 많이 기뻐했는지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그동안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나의 진심을 전할 수 있어서 좋았고, 가족애를 더욱 돈독히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특히, 추석을 맞아 사랑하는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100감사편지를 쓸 수 있게 해 주신 군단장님과 캠페인을 추진한 공보정훈부 간부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우리 가족은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전형적인 경상도 사람들이다. 나 또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표현도 부끄러워서 매년 어버이날에도 영혼 없이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게 고작이었다. 무뚝뚝하기가 마치 가을날의 쓸쓸한 바람과도 같았던 우리 가족들에게 어느 날 우연히 감사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군단에서 추진한 ‘추석맞이 사랑하는 가족에게 100감사편지 나누기’ 캠페인이었다.
맞벌이였던 부모님은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그저 평범한 가정에서 큰 굴곡 없이 자랐지만,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가끔 못된 말을 내뱉곤 했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그때 했던 말들이 부모님의 마음에 비수를 꽂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죄송스러운 마음에 차마 “그때 그런 말 해서 미안해, 엄마 아빠는 정말 최고의 부모님이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쉽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캠페인을 계기로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감사한 내용을 하나하나 적다 보니 정말 감사한 일들이 너무 많았고,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것은 모두 부모님의 덕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부모님이 내게 했던 모든 것들이 하나도 당연한 것이 없었고, 나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28년 만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100감사편지를 작성하는 동안 몇 번이나 울컥했는지 모른다. 눈물 콧물 쏟아가며 한 자 한 자 쓸 때마다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하는 마음은 더욱 커졌고, 존경하는 마음은 더욱 깊어만 갔다. 다 쓴 후에도 “부끄러운데 보낼까 말까”하고 잠시 고민했지만, ‘이번 기회가 아니면 내 맘을 전할 수 있을까? 부모님도 편지를 보면 분명히 좋아하실거야’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내서 소포를 집으로 보냈다.
양양에서 대구집까지 택배가 배달되는 동안 내 마음은 콩닥콩닥 떨렸다. 드디어 100감사편지를 받아 본 엄마는 “어떻게 이런 일까지 다 기억해? 이것까지 기억할지 몰랐어. 너무 감동했고 우리 딸 대견하다”며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시곤, 갑자기 “이건 진짜 코팅해서 액자에 걸어둬야지”라고 하길래 그저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코팅해서 대단한 우승 트로피처럼 잘 보이는 거실 탁자에 올려두었다고 한다.
이런 엄마와는 달리 별 반응이 없는 아빠가 서운하게만 느껴져 직접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아빠! 사랑하는 딸이 보낸 100감사편지를 본 소감이 어때요?” 아이처럼 툴툴거리는 내 전화에 아빠는 “허허, 그 자식”이라고 말하며 그저 소리내어 웃기만 했다. 평소 아빠의 무뚝뚝한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엄마와 함께 편지를 읽으며 아빠가 얼마나 감동 받았고 많이 기뻐했는지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그동안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나의 진심을 전할 수 있어서 좋았고, 가족애를 더욱 돈독히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특히, 추석을 맞아 사랑하는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100감사편지를 쓸 수 있게 해 주신 군단장님과 캠페인을 추진한 공보정훈부 간부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