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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전투 승리 비결은 위치 선점과 신속한 기동력”

정호영

입력 2020. 10. 23   16:50
업데이트 2020. 10. 23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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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대첩 100주년 특집 인터뷰/ 박남수 예비역 육군 중장

독립군 주력부대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연합
병력 및 무기 압도적 우위였던 일본군에 승리
36시간 안에 30㎞ 넘나들며 3번의 대승 거둬
한국인의 독립 의지 세계에 알린 상징적 전투
박남수(예비역 육군 중장) 장군이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이 대승을 거뒀던 비결을 군사적인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사진=이경원 기자
박남수(예비역 육군 중장) 장군이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이 대승을 거뒀던 비결을 군사적인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사진=이경원 기자


일제하 독립군이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던 청산리전투 승리비결이 100년 만에 밝혀졌다.

한마디로 독립군의 대승 비결은 한발 앞선 위치 선점과 신속한 기동력으로 적의 전투력을 분산시켰기 때문이라는 것. 종전 단순한 독립군의 정신적 우월과 참전자 기억에 의한 일방적 기록에서 벗어나 당시 일제 기동계획(간도출병사 등)과 독립군 관련 자료를 종합, 군사적 측면에서 상호 비교한 결과 독립군의 승리는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음을 밝힌 것이다.

이 같은 독립군의 승리 비결을 밝힌 주인공은 최근 발간된 『군인 이범석을 말한다』의 책 저자인 박남수 예비역 육군 중장. 박 장군은 기계화보병사단장과 수도방위사령관, 육사교장 등을 역임한 최고의 군사전문가로, 수년간에 걸쳐 청산리전투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입체적 작전적 측면에서 철저히 분석해 이러한 결론을 도출했다. 이범석장군 기념사업회장이기도 한 박 장군을 만나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의 승리 비결에 대해 대담을 나눴다. 다음은 박 장군과의 일문일답 요지다.

▶ 청산리전투는 어떠한 전투인가.

청산리전투 또는 청산리 대첩, 청산리 전역(戰役)이라고도 불리는 이 싸움은 1920년 10월 김좌진, 나중소, 서일, 이범석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과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을 비롯한 만주지역 독립군 연합 부대가 중국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일대에서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동한 대규모 일본군과 10여 차례 벌인 전투의 총칭이다.



▶ 청산리에서 전투가 벌어진 이유는?

1920년 전후로 한국인의 항일무장투쟁은 격화되고 있었다.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만 50여 항일무장단체가 국내 직공작전을 벌인 탓에 일제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이 일본군 중대급 병력을 봉오동에서 크게 무찌르자 일본군은 대규모로 병력을 구성해 만주 일대의 독립군 전체를 격멸하려고 쳐들어왔다. 당시 중국은 혼란기여서 만주 일대는 지방 군벌이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막강한 일본군이 10월 17일 자정부터 2개월간 군사작전을 벌이겠다고 통보하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자 만주 각지의 독립군들은 주둔지를 옮겨 피해야 하는 상황에서 여러 가지를 고려해 백두산 인근의 청산리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 전투 당시 일본군과 독립군 규모는?

당시 일본군 참모총장은 작전명령을 통해 한반도 주둔 조선군이 주동이 되어 만주 일대의 독립군을 초토화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함경북도 나남의 19사단 9000명, 20사단 2000명, 11사단 1000명, 안서지대 1000명, 관동군 1200명 등 총 2만여 명이 동원됐다. 이들은 3개 지대로 편성되어 동서남북으로 간도를 포위한 후 포위망 내부로 3개의 초토부대를 투입해 해당 지역 내의 독립군을 격멸하려 했다. 전형적인 ‘망치와 모루’ 전술이었다. 반면 독립군은 가장 규모가 큰 북로군정서가 1500명이었고,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300명을 비롯한 연합부대가 1000여 명이었다. 일본군이 독립군에 비해 약 8배나 많았다. 병력 수나 무기의 질에서 일본군이 압도적 우위였다.



▶ 청산리전투 결과 승리의 비결은?

1920년 10월 21일(음력 9월 10일) 오전 8시경, 청산리 전역의 첫 전투인 백운평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독립군의 주력부대인 북로군정서는 매복에 유리한 청산리 골짜기(백운평)를 선점, 정예 병력(2제대)을 배치했다. 반면 일본군의 야마다 대좌가 지휘하는 토벌대(약 1000명)는 좌우 2개 종대로 편성해 청산리 방향으로 전진했다. 이 중 야스카와 소좌가 지휘하는 전위대(1개 중대 병력)가 근접해 오자 2제대 지휘관인 이범석의 사격을 신호로 600여 명의 독립군이 일제히 화력(소총, 기관총, 박격포)을 퍼부음으로써 순식간에 적을 격멸시켰다. 이어 급보를 받고 야마다 토벌대 본대가 달려왔지만 이들도 독립군의 집중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때부터 2제대 독립군들은 김좌진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은밀히 철수를 시작해 갑산촌으로 신속히 이동했다. 적들은 한동안 백운평 골짜기에 갇혀 자기들끼리 오인 사격을 하는 등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21일 오전 11시부터 철수를 시작한 독립군들의 이동지는 약 30㎞ 떨어진 갑산촌이었다. 순차적으로 전투를 벌이며 빠져나가면서 신속한 산악행군을 통해 다음 날 새벽에 무사히 갑산촌에 도착했다. 1제대와 2제대가 다시 만난 독립군들은 이어 갑산촌에서 가까운 천수평에 일본군 기병중대가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기습 공격해 적을 전멸했다. 그리고 사살한 적 중대장(시마다 대위)의 품에서 작전보고서를 보고 또 다시 마루꼬우 874고지(어랑촌)로 신속히 이동했다. 적보다 먼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서였다. 적 주력 기병연대가 달려올 것을 예상해 한발 빠르게 전투태세를 갖춘 독립군은 허겁지겁 무방비로 오는 기병연대 본대에 기습 공격을 가함으로써 큰 타격을 입혔다. 비슷한 시각에 홍범도 독립군부대가 어랑촌 북쪽에서 일본군 수색대와 교전함으로써 일본군의 전투력이 분산되는 덕을 보기도 했다. 이후 몇 차례 산발적인 전투가 있었지만 미미했고,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유유히 사라졌다. 일본군은 이 전투로 1000여 명의 전·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6시간 안에 산림지역 30㎞를 넘나들며 3번의 대승을 거둔 것이었다. 유리한 위치 선점과 신속한 기동력이 독립군의 승리 비결이었다.



▶ 청산리전투 승리의 의미는?

독립군은 경술국치 후 10여 년의 일제강점 역사에 큰 타격을 가해 한민족에게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이는 향후 광복 때까지 끈질긴 무장투쟁에서 승리의 표본이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독립을 향한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면서 이제 막 출범한 상해 임시정부의 노력을 포함해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상에 널리 공표했다.

글=정호영/사진=이경원 기자


정호영 기자 < fighter7@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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