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완결 병영칼럼

[전선애 병영칼럼] 트로트, 좋아하세요?

입력 2020. 10. 23   16:32
업데이트 2020. 10. 23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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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선 애
방송작가
전 선 애 방송작가


화려한 밤거리를 달리는 자동차 안, 한 남자가 노래를 부르며 영화가 시작된다. “가진 것은 없어도 비굴하진 않았다. 긴가민가 하면서 설마 설마 하면서 부대끼며 살아온 이 세상을 믿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양자물리학> 속 배우 박해수가 운전대를 잡고 목청 높여 부르던 노래는 얼마 전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이웃집 형님으로 소환한 가황 나훈아의 노래 ‘사내’였다. 그보다 먼저 자동차 노래장면으로 유명한 영화 <비열한 거리>에서 배우 조인성이 불러 화제가 됐던 노래 ‘땡벌’의 원작가도 그다. 지난 추석 KBS가 방송한 ‘대한민국 어게인’ 공연으로 신드롬을 일으킨 나훈아는 최근 1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트로트 열풍의 정점을 찍었다.

요즘 가요계뿐 아니라 TV 프로그램의 대세는 트로트다. TV조선의 ‘내일은 미스 트롯’과 ‘내일은 미스터트롯’이 연이어 시청률 고공행진을 이어가자 방송사마다 트로트 관련 프로그램들이 쏟아지고 있다. 중장년 팬덤 문화에 1020세대까지 아우르며 K-POP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는 트로트 전성시대. 사람들은 이 열풍의 원인을 분석하느라 여념이 없다.

트로트(trot)는 ‘빠르게 걷다’라는 뜻의 영어로 1910년대 미국의 네 박자 사교 댄스인 ‘폭스 트롯’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이 서양음악이 일제강점기 우리라나에도 전해졌는데 민요의 떨림과 꺽임 소리가 더해진 후 시대의 흐름과 함께 변화하면서 정착한 것이 트로트라고 한다.

처음엔 널리 사랑받는 노래라 해서 유행가라 불렀는데, 최초의 유행가로 손꼽히는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할 일이 무엇이냐’고 노래하던 ‘희망가’는 미국 흑인들의 찬송가가 원곡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왜색논란에 휩싸이며 뽕짝이라 치부되기도 했지만, 트로트만큼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대중음악이 또 있을까 싶다. 때론 흥겹게, 때론 애절하게, 한번 들으면 흥얼흥얼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쉽고 구성진 가락은 하루하루 삶이 버거운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은 건 바로 노랫말이었다. 나라 잃은 슬픔과 전쟁의 상처, 고향의 그리움과 가난의 서러움처럼 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절절한 사연들이 그대로 가사가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쉬운 언어로, 결코 어렵게 돌려 말하지 않는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누구나 부르는 노래였고, 그 속에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눈물도 있었다 (송대관 ‘네박자’).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 찍으면 도로 남이 되는 장난 같은 인생사(김명애 ‘도로남’), 우지 마라 세월 간다 아까운 청춘 간다 아서라 말어라 춤이나 추자 (나훈아 ‘딱 한번 인생’)며 사람들을 다독인다. 마음이 지친 사람들은 얼큰해진 목소리로 트로트 한 자락을 부르며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속내를 드러내곤 했다. 누군가에겐 인생이고, 추억인 그 노래들은 어렵고 힘든 고비를 견디게 해준 고마운 위로였다. 시대를 넘나들며 오랫동안 트로트가 사랑받아온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유행은 돌고 도는 법이니, 지금의 인기가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유치한 옛날 음악이라 무시했던 이 비주류음악의 매력을 재발견하고 있는 지금, 한동안 이 구성진 가락에 위로를 받을 것 같다. 영화 <양자물리학>에서 주인공은 “당신과 나의 파동이 맞으면 공명이 일어나서 에너지가 커집니다. 이런 게 바로 시너지 효과라는 거죠”라고 말한다. 적어도 지금 우리는 트로트와 파동이 맞는 시대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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