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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사 10월 22일] 1950년 김일성승용차 노획 1982년 부산항 통해 다시 한국땅에

입력 2020. 10. 19   08:19
업데이트 2020. 10. 21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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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22일

국군6사단 7연대, 청천강가에서 김일성 승용차 노획

1951년 7월

워커장군 부인에게 증정되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1982년 10월 22일

지갑종 유엔참전국협회장 노력으로 다시 한국땅에 


6·25전쟁을 통해 획득한 전리품 중에는 사연이 많은 물품들이 적지 않다. 평양 탈환 후 국군 6사단 7연대가 청천강가에서 노획한 ‘김일성 승용차’도 여기에 포함된다. 


김일성 승용차를 노획한 부대와 장병에 대해서는 한동안 몇몇 서로 다른 주장이 있었지만, 현재 김일성 승용차를 소장하고 있는 전쟁기념관은 당시 사단과 참전장병들의 고증을 통해 1922년 10월 22일 청천강가에서 국군 6사단 7연대가 노획했다는 사실을 설명문에 명기하고 있다.


전쟁기념관에 전시 중인 김일성 승용차. 사진 = 한재호 기자
전쟁기념관에 전시 중인 김일성 승용차. 사진 = 한재호 기자


스탈린이 김일성에 선물한 것이라는 이 승용차는 옛 소련의 자동차 회사인 스탈린그라드가 제작한 8기통 4도어 7인승의 지스(ZIS) 리무진으로 모델명은 3HC, 차량번호 6911001087이었다. 무게 2615㎏, 길이 5.87m, 너비 1.98m, 높이 1.79m.


압록강 초산(楚山)까지 진격해 부대 이름을 ‘초산부대’로 삼고 있는 7연대는 당시 후퇴하는 북한군을 추격하면서 20여 대의 승용차를 노획했다. 이때만 해도 이 차량 가운데 김일성이 타던 승용차가 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사단의 한 고위 간부가 노획 차량 가운데 가장 고급스런 1대를 타고 평양에 왔을 때 평양시민들이 차량의 정체를 알고 ‘김일성이 타던 승용차’라며 "김일성을 잡았느냐?"고 물은 것이 소유자를 확인하는 단초가 되었다고 한다.


이 사실은 당시 국방부장관을 거쳐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되었고 이 대통령은 이 차량을 낙동강전선 방어에 큰 공을 세운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에게 증정하려 했다. 하지만 워커 장군은 그해 12월 23일 아들인 샘 S 워커 대위(훗날 미국 육군 대장)의 은성무공훈장 수상을 축하해 주기 위해 가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목숨을 잃어 차량은 장군의 부인에게 전달되었다.


차량은 1951년 7월 배편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고, 장군의 부인은 미국에서 이 차량을 운행하다 고장으로 인해 다른 승용차와 교환했는데 이후 이 차량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 차량은 30여 년이 지난 30여 년이 지난 뒤인 1982년 10월 22일 부산항을 통해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1982년 한국으로 돌아온 후 복원 과정을 거쳐 노획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철원군에서 전시되고 있는 김일성 승용차. 국방일보DB.
1982년 한국으로 돌아온 후 복원 과정을 거쳐 노획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철원군에서 전시되고 있는 김일성 승용차. 국방일보DB.


6·25전쟁의 의미를 후세에 알리기 위해 역사적인 전사품의 수집이 중요하다고 늘 강조해온 지갑종 유엔참전국협회장이 기울인 관심과 노력의 결과였다. 


지 회장이 언론과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지 회장은 1981년경 미군 참전용사와 자동차 수집가와 만난 자리에서 ‘김일성 승용차’의 소재를 물었고, 이 수집가가 자동차 전문지에 김일성 승용차를 찾고 있다는 글을 기고하면서 소유주를 확인하게 되었다.


지 회장은 당시 15만 달러를 주면 팔겠다는 소유주와 협상 끝에 7만 5000달러까지 가격을 낮췄다. 구매 비용은 대우자동차가 부담했고 국내에 들여온 후 삼성항공에서 11개월 동안 2억 원의 비용을 들여 원형대로 복원했다. 이 과정에서 자동차 본사에서 도면과 부품을 입수하는 등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99%까지 복원에 성공했다. 경남 사천 항공우주박물관에서 공개되다 2013년 전쟁기념관에 기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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