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건축, 전쟁사를 말하다

70% 복구 불가능한 파괴 7대 세계 불가사의

입력 2020. 10. 16   17:20
업데이트 2020. 10. 18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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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


65만 평 면적 3중 둘러싼 구조
크메르 제국의 수리야바르만 2세
자신의 영묘로 쓰려 건축 

 
제국 멸망 후 밀림에 묻혔다 발견
19세기 학자 앙리 무오, 유럽에 알려
내전 겪으며 훼손… 유네스코 복원 중 

 

앙코르 와트 전경. 앙코르 와트에서 앙코르(Angkor)는 ‘왕이 있는 도읍’, 와트(Wat)는 ‘사원’을 뜻하는데, 16세기 이후부터 사용된 이름이다.
앙코르 와트 전경. 앙코르 와트에서 앙코르(Angkor)는 ‘왕이 있는 도읍’, 와트(Wat)는 ‘사원’을 뜻하는데, 16세기 이후부터 사용된 이름이다.

캄보디아 내전 당시 앙코르 와트에서 베트남군과 크메르루주의 게릴라들이 벌인 총격전으로 유적에 생긴 총알 자국이 현재도 남아 있다. 
 사진=psamathe.net
캄보디아 내전 당시 앙코르 와트에서 베트남군과 크메르루주의 게릴라들이 벌인 총격전으로 유적에 생긴 총알 자국이 현재도 남아 있다. 사진=psamathe.net

캄보디아 시엠레아프에 있는 앙코르 와트는 크메르 제국이 12세기 초에 건립한 세계에서 가장 큰 사원이다. 이곳은 폭이 200m인 해자(垓字·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를 포함, 동서 길이는 1500m, 남북의 폭은 1300m, 둘레는 5.5㎞, 면적은 65만 평(210만㎡)인 직사각형 건축물이다. 웅대한 방추형 중앙사당탑(中央祠堂塔)을 회랑(回廊·사원, 궁전에서 주요 부분을 둘러싼 지붕이 있는 긴 복도)이 3중으로 둘러싸고 있는 구조이며, 탑은 모두 다섯 개로 구성돼 있다. 앙코르 와트는 크메르 제국이 멸망한 15세기 이후 밀림 속에 묻혔다가 19세기에 프랑스의 박물학자 앙리 무오에 의해 유럽에 알려졌다. 복원이 시작된 20세기에 캄보디아 내전을 겪으며 이곳의 불상들은 훼손되고 약탈됐다.


12세기 수리야바르만 2세에 의해 건설


9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인도차이나반도를 통치한 크메르 제국은 톤레사프 호수의 풍부한 물을 바탕으로 발전했는데, 저수지를 만들어 논농사에 활용했고 삼모작을 통해 쌀을 많이 생산하면서 12세기에 부강한 왕국이 됐다. 크메르인들은 왕이 죽으면 신과 하나가 된다고 믿었다. 크메르 제국의 가장 위대한 왕 중의 한 명인 수리야바르만 2세(재위 기간 1113~1150, 생몰연도 미상)는 힌두교의 신 비슈누에게 봉헌하고 자신의 영묘로 쓰고자 앙코르 와트를 짓도록 명했다. 앙코르 와트에서 창립 연대나 건축 시기를 알려주는 유물이 단 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기에, 본래 이름과 자세한 건축 시기는 미상이나 대략 30년에 걸쳐 지어진 걸로 추정된다.

크메르 제국의 농민들은 농사 외에도 수리시설을 유지하는 일도 해야 했기 때문에 지배자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더욱이 이웃 나라 태국과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병사로 징발된 농민들은 1150년 무렵에 수리야바르만 2세가 사망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크메르 제국은 농민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국력이 크게 쇠퇴했고, 그 후 왕권 쟁탈전이 벌어져 왕조는 분열의 위기에 놓였다. 1177년 오랜 숙적이던 참파(베트남 중부 지방에 있던 말레이계의 구 참족이 세운 왕국)가 크메르 제국을 점령하고, 큰 피해를 안겼다. 그러나 자야바르만 7세(1125~1218)가 왕위에 올라 국력을 회복해 참파를 물리치고 나라를 크게 발전시켰으며 미얀마와 라오스, 태국의 일부를 차지했다. 자야바르만 7세는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앙코르 와트 북쪽에 새로운 수도인 앙코르 톰을 건설하고 바이욘 사원을 지었다. 바이욘 사원이 국가 사찰의 지위를 획득하자, 앙코르 와트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하지만 크메르 제국은 무리한 원정과 사원 건설로 12세기부터 급격히 쇠퇴해 영토를 점차 상실하다가 급기야 1431년 태국의 아유타야 왕조에 의해 수도를 점령당해 결국 멸망한다. 이듬해부터 앙코르 와트는 방치되다가 16세기경 불교 사원으로 바뀌었다. 밀림 속에 있었던 앙코르 와트는 1860년 프랑스 박물학자 앙리 무오(1826~1861)에 의해 유럽에 크게 알려졌다. 그의 연구는 당시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세를 뻗치던 프랑스 정부의 관심을 끌었다. 결국 프랑스는 캄보디아 지역을 1863년 8월 11일 보호령으로 삼으며, 당시 태국 영토였던 앙코르 와트의 소유권을 차지하기 위해 태국을 공격해 캄보디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했다.


캄보디아 내전으로 불상 훼손·약탈

프랑스는 크메르 제국을 부르던 깜부자(Kambuja)를 프랑스어로 캉보주(Cambodge)라고 불렀고, 이것이 영어로 캄보디아(Cambodia)라고 불리게 됐다. 캄보디아가 1953년 11월 9일 행정적으로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서 독립한 이후에도 프랑스 정부는 앙코르 와트의 복원과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호찌민이 이끄는 하노이 정부군에 패해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철수하면서 1960년대에 시작된 고고학 탐사작업은 정치적인 이유로 자주 중단돼 사원은 다시 황폐화되기 시작했다.

캄보디아 내전(1967~1975)이 발발하고 캄보디아의 급진적인 좌익 무장단체인 크메르루주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캄보디아 정권을 장악했다. 사원에 큰 피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전쟁의 참화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앙코르 와트가 있던 지역은 1972년부터는 외부인에게 폐쇄된 이후 낮에는 베트남군이, 밤에는 크메르루주의 게릴라들이 번갈아가며 장악하면서 불상이 훼손되고 유적이 파괴됐다.

전쟁이 끝나고 유엔이 캄보디아에서 평화유지 활동을 시작한 1992년 사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하지만 전쟁과 약탈로 인해 중요 유물 30점 이상이 소실됐고, 전체 유적지의 70%가 복구 불가능한 상태로 파괴됐다. 현재 유네스코는 사원을 특별 관리하며 복원을 계속하고 있다. 앙코르 와트는 캄보디아의 국가적인 상징으로 국기에 새겨져 있다. 캄보디아는 국민소득이 250달러에 못 미치는 세계 빈국 중의 하나이지만, 사원만은 캄보디아의 찬란했던 영광을 상기시키는 건축물이다.

<이상미 문화·예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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