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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사 10월 20일] 1950년 6·25전쟁 최초 공수작전 전개

입력 2020. 10. 19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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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작전에 투입된 미 공군 소속 C-119 수송기가 전투물자를 낙하산으로 투하하고 있다.
공수작전에 투입된 미 공군 소속 C-119 수송기가 전투물자를 낙하산으로 투하하고 있다.


1950년 10월 20일
유엔군, 숙천 순천 공정작전 전개 
6·25전쟁 최초 공수작전으로 북한군 후방차단

6·25전쟁 중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당장 눈앞의 전투상황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상황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데 노력을 집중했다.


그는 38선 돌파 후 평양 탈환작전을 전개하면서 이미 평양 후방에 공수부대를 낙하산으로 강하시켜 북한군의 후퇴를 차단하고, 북한군 수뇌부를 사로잡는 대담한 공수작전을 구상했다. 유엔군 포로 3000여 명을 구출하는 것도 작전의 또 다른 목표 중 하나였다. 


국군이 평양을 탈환한 1950년 10월 19일, 그 이튿날인 20일에 미187공수연대 소속 4200여 명의 병력은 105㎜ 곡사포 12문과 각종 장비를 갖고 미 공군 C-119·C-47 수송기 113대에 나눠 탔다. 이날 오후 2시 강하 목표 윌리엄(William)으로 명명된 숙천과 목표 이지(Easy)로 명명된 순천에 미군의 낙하산 강하가 시작됐다.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하는 6·25전쟁 중 최초의 공정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유엔군은 이날 강하 후 약 3시간이 경과한 오후 5시 무렵 187공수연대는 목표로 했던 지점을 모두 안전하게 확보했다. 순천으로 투입된 187연대 2대대도 순조롭게 작전을 진행했다. 이어 미187공수연대는 10월 21일 후퇴하던 북한군을 포착,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북한군 규모는 연대급에 불과하고 북한 정권이나 북한군의 수뇌부라고 할 만한 인물은 없었다.


22일 지상에서 북진하는 유엔군과 다시 만날 때까지 187공수연대는 사살 1000여 명, 포로 3818명이라는 전과를 거뒀다. 다만 약 3만 명으로 예상되는 북한군 주력부대의 포위 섬멸이나 수뇌부를 포로로 잡겠다던 원래의 작전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탈출 지시가 있었던 10월 13일 밤이나 14일 새벽에 이미 평양에서 벗어났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참고 기사 

국방일보 기획 : ‘다시 쓰는 6·25전쟁 <36>숙천·순천 공수작전

2010년 11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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