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6.25 70주년, 해외참전용사 희망드림 코리아

[6.25 70주년] “70년 계속된 가난… 전쟁보다 더한 고통”

김용호

입력 2020. 03. 04   17:07
업데이트 2020. 03. 04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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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에티오피아 참전영웅 가브리엘 셀라세 옹

 
강뉴부대 일원으로 한국전쟁 참전
야간순찰 때 잃은 전우에 죄책감
귀국 후엔 황실근위대 30년 근무
연금 2만 원으로 딸 가족과 생활
“이마저 끊기면 아이들 어떻게 할지…”

 

에티오피아 참전영웅 가브리엘 셀라세(100·오른쪽 둘째) 옹은 6·25전쟁 파병 임무를 마치고 조국으로 귀환해 지금까지 아디스아바바 외곽  참전용사촌인 굴렐레 마을에서 살고 있다. 사진은 10여 년 전부터 딸 아세테르(35·맨 왼쪽), 외손주 사무엘(12)·아젭(8)과 함께 살고 있는 모습.  월드비전 제공
에티오피아 참전영웅 가브리엘 셀라세(100·오른쪽 둘째) 옹은 6·25전쟁 파병 임무를 마치고 조국으로 귀환해 지금까지 아디스아바바 외곽 참전용사촌인 굴렐레 마을에서 살고 있다. 사진은 10여 년 전부터 딸 아세테르(35·맨 왼쪽), 외손주 사무엘(12)·아젭(8)과 함께 살고 있는 모습. 월드비전 제공

  
“내 나이 서른이던 1951년 ‘강뉴부대’의 일원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죠. 당시 미 7사단에 배속돼 최전선 강원도 화천·철원 일대 700고지, 낙타고지, 요크고지를 넘나들며 치열한 전투를 펼쳤죠. ‘에티오피아 전쟁영웅들’은 전장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난생처음 경험하는 강추위와 눈보라를 헤치며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피 끓는 청춘을 바쳤죠. 이제 한국에선 포성이 멎었지만 이곳에서는 70년이 지난 지금도 가난과 사투를 벌이고 있어요. 전쟁보다 더한 고통이죠.”


에티오피아 최정예 황실근위대를 주축으로 한 ‘강뉴(Kagnew)부대’ 출신인 가브리엘 셀라세(100) 옹은 70년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낙타고지’라는 말만 들어도 목소리를 높였다. 노환을 앓고 있지만 어눌한 몸짓으로 그때의 동작을 하나하나 재현했다. 치열한 전투 현장을 설명할 땐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눈살을 찌푸렸다. 전쟁영웅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그에게 6·25전쟁은 책으로 배운 역사가 아니라 온몸으로 체험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자긍심 또한 대단하다.

100세 전쟁영웅, 셀라세 옹이 대한민국에서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싸운 이유는 에티오피아 역사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티오피아)는 1935년 이탈리아 ‘무솔리니군(軍)’의 침략을 받았어요. 즉시 국제연맹에 지원을 호소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요.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은 곧 2차 대전의 도화선이 됐죠. 우리 국민은 이러한 아픈 역사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요. 당시 유엔의 한국전쟁 파병 요청에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즉시 황실근위대를 주축으로 1200명을 선발했죠. 병사들의 투철한 충성심 덕분에 파병 경쟁률이 엄청나게 높았어요.”

셀라세 옹은 강뉴부대 1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사선을 넘나드는 격전을 수없이 경험했다. 그중에서도 1951년 어느 날 밤 기억은 지금도 지울 수 없다.

“전우 2명과 함께 평소와 다름없이 초긴장 상태로 강원도의 험준한 산악지형 야간 순찰에 나섰죠. 그런데 적의 매복 작전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어요. 순식간에 두 전우를 잃고 말았죠.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손쓸 겨를도 없었어요. 지켜주지 못하고 혼자 살아 돌아왔다는 죄책감에 아직도 가슴이 아프고, 그날의 기억은 평생 잊지 못해요.”

6·25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1952년 귀국한 셀라세 옹은 황실근위대 조교로 30년을 더 근무했다.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전우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더 열심히, 더 치열하게 인생을 살았지만 가난은 극복할 수 없었다.

그의 조국인 에티오피아는 한국전쟁에 3518명을 파병했다. 그중 생존자는 현재 138명이며 평균 나이는 90세다. 셀라세 옹도 그 가운데 한 분이다. 참전용사와 후손들은 지금 대부분 가난에 찌들어 산다. 한때 셀라세 옹의 조국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의 맹주였으나 급격한 경제 파탄과 함께 빈국으로 전락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8년 에티오피아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772달러(91만 원)로 세계 139위다. 내전으로 홍역을 치르는 예멘(133위), 대지진의 여파가 남은 아이티(136위)보다 낮은 수준이다.


가브리엘 셀라세 옹의 외손녀 아젭은 비행기 조종사가 꿈이다.
가브리엘 셀라세 옹의 외손녀 아젭은 비행기 조종사가 꿈이다.


셀라세 옹은 웃는 모습이 예쁜 외손녀 아젭(8)과 외손자 사무엘(12) 그리고 딸 아세테르(35) 등 3대 네 식구가 함께 아디스아바바 인근의 한국전쟁 참전용사 마을 굴렐레에 살고 있다. 굴렐레 비탈에 있는 집은 지붕에선 빗물이 줄줄 새고, 진흙과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쌓은 벽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다. 생활고로 가옥 수리는 엄두도 못 낸다. 가족의 살림살이는 셀라세 옹의 연금 2만 원에 의존한다.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버틴다. 그는 10년 전부터 딸 아세테르와 외손주 아젭·사무엘과 함께 살고 있다. 딸의 가정은 아젭이 태어나면서 풍비박산이 났다. 처가에 얹혀 살며 경제적 부담감을 느낀 사위가 쥐도 새도 모르게 가족을 떠났기 때문이다.

부모 입장에서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자식은 자식이다. 셀라세 옹에게 딸 아세테르는 항상 ‘아픈 손가락’이다.

“내가 죽으면 딸은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야 해요. 딸에게는 남편도 친척도 없어요. 우리 네 가족의 생활비는 내 연금에 의존하기 때문에 연금이 중단되면 딸과 외손주들은 거리로 나앉을 판이에요. 이것이 내가 쉽게 눈 감을 수 없는 이유죠.”

손주 재롱이 삶의 ‘보약’이라는 셀라세 옹. 하루하루가 외줄 타기 하듯 불안하지만 아젭과 사무엘을 바라보는 눈길은 깊고 그윽하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사무엘은 시험만 보면 1등을 놓치지 않고, 머리가 좋은 아젭은 ‘비행기 조종사’가 되는 게 꿈이다. ‘6·25전쟁 참전영웅’ 셀라세 옹에게 마지막 소원이자 희망이 이들의 꿈에 ‘날개’를 달아 주는 것.

“소중한 우리 아이들의 꿈을 지켜 주는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 주세요.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도움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김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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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은(강원 강릉), 김가은(서울 노원), 김영숙(서울 송파), 이순선(대구 동구), 한승균(광주 광산)

김용호 기자 < yhkim@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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