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전쟁과 미디어

“그들의 전쟁터는 TV 스크린과 신문 1면”

입력 2020. 01. 07   17:20
업데이트 2020. 01. 07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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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끝>테러리즘과 미디어


게릴라전 일환 ‘미디어 이벤트’ 성격
공포심 유발 통해 메시지 전달 목표
대대적으로 보도될수록 목적 이뤄 

 
1985년 ‘TWA 여객기 납치 사건’
선정적·과도한 보도 비판 받으며
테러리즘 관련 언론 문제점 부각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
“대중홍보의 산소 공급을 차단해야”
테러리스트가 원하는 보도 자제 촉구



테러리즘의 어근을 이루는 ‘terror’는 공포를 뜻한다. 테러리즘은 무고한 민간인이나 비전투원에 대해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공포심을 확산시키면서 자신들의 메시지나 요구 사항을 대중적으로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공포심을 유발하는 폭력적 사건을 발생시켜 대중의 시선이 집중되도록 만드는 것이 테러리즘이다.

테러리즘은 정규전과 달리 ‘미디어 이벤트’로서 성격을 갖는다. 미디어 이벤트란 미디어를 통해 전파되는 것을 목적으로 사전에 계획되어 발생하는 사건, 혹은 미디어가 없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사건을 뜻한다.

정규전은 많은 언론 보도를 수반하지만, 언론이 보도를 하지 않더라도 발생할 수 있다. 상대 정부의 전복이나 영토 점령이 궁극적인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테러리즘은 공포심 유발을 통한 메시지 전달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미디어와 공생 관계에 있다. 테러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가 없고 테러 현장에 대한 사진이나 생방송이 없다면 공포심이 유발되거나 확산되기는 어렵다.

언론사들이 특종 경쟁을 벌이면서 테러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할수록 테러리스트들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테러리즘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를 대상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대다수다. 언론이 엄격히 통제된 곳에서는 테러 사건이 벌어지더라도 대중이 이에 대해 소상히 알기는 어렵다.


미국의 인질구출 작전 보도


테러리즘과 언론 보도의 문제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트랜스 월드 항공(TWA) 847 여객기 납치 사건이다. 1985년 6월 미국으로 향할 예정이던 해당 여객기는 아테네 공항 이륙 직후 무기를 소지한 4명의 테러범들에 의해 납치되어 레바논의 베이루트 공항에 착륙했다. 테러범들은 탑승객들을 인질로 잡고 이스라엘에 억류된 시아파 레바논 포로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용의자 중 한 명은 지난해 9월 그리스에서 체포됐다). 베이루트에서 연료를 공급받는 대가로 17명의 승객을 풀어준 테러범들은 비행기를 이륙시켜 알제리로 향했다. 이 시점에 미국 레이건 행정부는 인질로 잡힌 승객과 레바논 포로의 맞교환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 사이 언론은 미국이 인질 구출 작전을 위해 대테러부대 델타포스를 현지로 급파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이듬해 개봉한 척 노리스 주연의 ‘델타포스’는 이 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다). 알제리는 구출 작전을 펼치기 좀 더 유리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테러범들은 비행기를 이륙시켜 다시 베이루트로 향했고, 인명 구조는 그만큼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언론 보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염두에 두지 않고 속보를 내보낸 탓이었다.


인질 승객의 안전문제 소홀


미국 정부는 구출 작전 과정에서 많은 미국인이 희생될 수 있음을 인지하고 레바논 시아파 지도자 나비 베리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중재자로 나선 베리는 미국이 레바논인들을 석방하도록 이스라엘 정부에 먼저 압력을 행사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 방송사들은 베리와 방송 보도 내용을 협의하고 베리와 직접 인터뷰하면서 베리의 중재안을 부각시켰다. 베리는 ‘굿모닝아메리카’ 같은 유명 방송프로그램을 통해 미국 시민들이 나서서 레바논 포로 석방을 정부에 요청할 것을 당부했다. 물론, 베리의 중재안에 대해서는 찬반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방송 보도에서 인질 승객의 안전 문제는 그만큼 덜 급박한 문제로 인식되었다.


테러범 요구가 인질의 입 통해 방송 전파

미국 방송사들은 테러범들과 협상을 벌여 승무원 및 승객 등 인질과도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을 위해 테러범들에게 금전을 지불했다는 설도 있지만 방송사들은 부인했다(중요한 보도를 위해 취재원에게 돈을 지불하는 행위가 절대적으로 비윤리적인 것은 아니다). 기자회견에서 인질들은 자신의 신변이 안전하며 정부가 구출 작전에 나서지 말고 레바논 포로를 석방하라고 말했다. 테러범들의 요구가 인질의 입을 거쳐 방송 전파를 탄 것이다.

한편, 기장이 조종석 창문을 통해 방송 인터뷰를 하던 도중 테러범 중 한 명이 기장 머리 위로 권총을 흔들었다. 테러범이 권총을 들고 위협하는 순간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여유만만한 기장의 얼굴 표정은 드라마틱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 테러범은 권총에 있던 총알을 빼고 빈총을 들고 있었고 기장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10대 청소년이었던 테러범은 방송 카메라가 비행기 가까이 다가오자, 테러범 ‘인증샷’을 찍기 위해 조종석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일종의 이미지 조작이었던 셈이다.


언론보도 태도 성찰하는 계기 마련

여객기 납치 사건은 대다수 인질의 희생 없이 마무리됐지만 테러리즘 관련 언론보도 태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선정적이고 과도하게 많은 양의 언론 보도에 대한 문제가 지적됐다.

CBS 방송 뉴스부문 사장이었던 프렌들리는 “테러리즘은 게릴라전의 일환으로 그 전쟁터는 텔레비전 스크린과 신문 1면”이라며, 테러리스트에게 “당신의 메시지를 우리의 전파에 태워내 보낼 수 없다”는 점을 단호하게 인식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미국 변호사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테러리스트에 대한 ‘대중홍보의 산소’(oxygen of publicity) 공급을 차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정부가 언론을 검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언론이 자율적 행동 강령을 제정해 테러리스트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들은 보도를 자제해야 한다고 그녀는 촉구했다.


<김선호 한국언론진흥재단 선임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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