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독립군의 전설 김좌진

‘삼부 완전해체 후 유일당 조직’ 통합 방안 수용

입력 2019. 12. 17   16:09
업데이트 2019. 12. 17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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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제5부 시련과 재기 ⑧ 민족유일당운동


안창호, 만주서 민족 대동단결 호소
민족통일전선 수립 결국 무산되기도 

 
정의부 수장이자 통합 상징 김동삼
김좌진 찾아와 유일당 필요성 역설 

 
기득권 포기 등 신뢰 바탕 모임 참여
혁신의회 조직하며 신민부 해체 

 

안창호와 상해임정 국무위원. 안창호는 1927년 길림에서 만주지역 유일당운동의 불을 지폈다.
안창호와 상해임정 국무위원. 안창호는 1927년 길림에서 만주지역 유일당운동의 불을 지폈다.


일송 김동삼. 만주지역 무장단체 통합의 상징이다.
일송 김동삼. 만주지역 무장단체 통합의 상징이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험난했던 일을 하나만 꼽으라면 필자의 소견으로는 하나의 통합된 정부와 군대를 만드는 일이었다. 임시정부는 1941년 11월 28일 ‘대한민국 건국강령’이 선포됐을 때, 군대는 1942년 4월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지대로 편입됐을 때 비로소 완전한 통일을 이뤘다. 임정 수립 후 22~23년 이상이 걸렸다. 통합은 그만큼 힘들었다.

그렇다고 통합 논의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이미 기술했듯 1921년 북경에서 개최된 ‘군사통일회의’를 시작으로 1923년의 ‘국민대표회의’, 1926년 10월에 결성된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의’ 조직 등 줄기차게 통합의 필요성은 대두됐다. 그러나 만나면 헤어졌다. 이념은 다양했고 이론은 분분했다. 숱한 잘난 사람들은 이를 수렴할 큰 그릇을 만들지 못했다. 그러던 중 2대 국무령에 취임한 ‘홍진’이 취임식에서 민족대단결을 위한 대당 결성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두 가지 화두를 던졌다. 중국식 ‘이당치국’과 ‘민족대동단결’이었다. 이를 계기로 민족유일당 구축 운동이 전 중국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사실 유일한 군사력을 보유한 만주 지역이야말로 대동단결이 가장 시급한 곳이었다.

1927년 겨울이 한창인 만주땅으로 ‘안창호’가 왔다. 2월 길림 동대문 밖 ‘대동공사’에서 500여 명의 한인이 운집한 가운데 민족의 대동단결을 호소했다. 울림은 컸다. 비록 남만 지역 중심의 단체들이었지만 안창호를 중심으로 정의부계와 사회주의계가 모였다. 민족통일전선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1927년 4월 길림 신안둔에서 모인 이 모임은 ‘조선혁명당’으로 유일당명까지 만들었으나 이념의 지향점이 달랐다. 역시 흩어졌다.

그러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이념의 합일을 위해 ‘이탁’을 중심으로 ‘시사연구회’라는 단체가 만들어졌다. 거기에다 1926년 5월 조봉암이 영안현 영고탑에 만들어 만주 내 한인사회주의자들의 중추기관 역할을 하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국내외를 통하여 민족유일당이 성립되는 날에는 무조건으로 이에 참여할 것”을 지시했다.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 ‘남만혁명동지연석회의’를 소환하기로 했다. 그러나 정의부의 오동진과 신민부의 김혁·유정근이 피체되는 등 만주 일대가 어수선한 혼란에 빠졌다. 결국 회의는 열리지도 못했다.

그 무렵인 1928년 1월 상해에서 민족통일운동을 촉진시키고자 홍진과 정원이 만주로 왔다. 국무령까지 지낸 대동단결론의 선봉 홍진이 직접 만주를 찾은 것이다. 다시 유일당운동은 계속됐다. 당시 유일당운동은 정의부가 주도하고 있었다. 정의부의 수장은 ‘일송 김동삼’이었다. 김동삼이 누군가? 안동 유림 출신으로 석주 이상룡과 함께 만주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한 거인이다. 그럼에도 겸손했고 나를 내려놓을 줄 아는 대인이었다. 지금도 ‘통합의 상징’하면 ‘김동삼’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아도 되는 어른이다.

1928년 4월 신민부 중앙위원장으로 동분서주하던 김좌진에게 어른 한 분이 노구를 끌고 찾아왔다. 김동삼이 북만주 해림까지 김좌진을 찾아온 것이다. 김좌진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땅에 처음 발을 디딜 때 이상룡과 더불어 김좌진을 아끼고 지원해 준 김동삼 아닌가? 김동삼은 일제와의 전쟁을 위해서도 유일당은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신민부 간부들에게 역설했다. 김좌진의 노선과도 일치했다. 또한 뭉치기 위해서는 기득권을 버려야 함을 호소했다. 김좌진은 물론 신민부 간부들도 김좌진이 동의하면 기꺼이 이 호소에 따를 준비가 돼 있었다. 김동삼이 비록 정의부 수장이긴 하지만 헤게모니 장악이 아니란 걸 알았다. 그 순수성을 모를 리 없었다. 김좌진은 기꺼이 통합 모임에 참여할 것을 약속했다.

마침내 1928년 5월 12일 만주지역 유일당 조직을 위한 ‘민족유일당촉성회’가 화전현에서 열렸다. 만주 지역 18개 단체가 참여한 대규모 회의였다. 그러나 정의부와 함께 만주를 대표하는 두 개 부가 참여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참의부가 중국군의 방해로 중간에 돌아갔고 신민부는 오는 과정이 순탄치 못해 회의가 끝난 뒤 겨우 도착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단체’ 위주로 통합할 것이냐 ‘개인’ 위주로 통합할 것이냐를 두고 맞붙은 갑론을박을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단체중심론을 제시했던 측은 ‘전민족유일당조직협의회’를, 개인중심론을 주장했던 측은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라는 구분하기도 힘든 이름의 단체들만 만든 뒤 또 결렬되고 말았다.

결국, 정의부가 3부만이라도 통합하자는 안을 다시 제시했다. 김좌진 역시 어떻게 하든 통합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1928년 9월 김좌진은 황학수를 대동하고 길림으로 갔다. 그러나 회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또 다시 촉성회에서의 논란이 계속됐다. 정의부는 단체 본위의 통합에서 한 발짝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정의부 중심의 통합일 뿐이었다. 정의부가 유일당을 자신의 세력 안에 두고자 하는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노선이 정의부 전체의 의견도 아니었다.

김좌진은 김동삼의 말을 상기시켰다.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통합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김동삼마저 정의부를 탈퇴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거기에 참의부 대표 김승학도 대표권 무시에 반발해 참의부를 탈퇴하고 만다. 김좌진은 김동삼의 방안을 중심으로 김동삼·김승학 등과 세력 규합에 나섰다. 김동삼의 통합 방안은 그랬다. ‘삼부 완전해체 후 유일당 조직’이었다. 이들은 의견이 일치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1928년 12월 하순 길림에서 조직된 ‘혁신의회’였다. 신민부의 김좌진·황학수·김시야·정신, 참의부의 김승학·김소하, 정의부의 김동삼·지청천·김상덕·김원식 등이 함께했다. 김좌진은 혁신의회를 조직하며 신민부를 해체했다. 기존의 단체를 해체하고 유일당을 조직한다는 애초의 원칙에 따르기 위해서였다. 혁신의회는 결성 목적을 추진하기 위해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를 결성했다.

책진회에는 공산주의 세력도 참여했다. 조공만주총국 외곽단체인 ‘재중국한인청년동맹’이 그런 단체였다. 김좌진은 갈등했지만 대의를 위해 수용한다. 그런데 1929년 4월 정의부가 협의회를 중심으로 신민부 민정파와 참의부 반김승학파, 그리고 사회주의 계열 일부 등을 통합해 군정부인 ‘국민부’를 조직한다. 반쪽짜리이지만 어찌됐건 ‘유일당’ 하나가 만들어지긴 한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5월 혁신의회 활동 기간이 종료됐다.

이것도 지금의 눈으로 보면 이상하기 이를 데 없다. 1년의 한시적 기간을 정해 두고 결과물이 나오지 않으면 해산한다? 그럴 수는 있지만 그토록 치열하게 이합집산을 거친 끝에 다시 각자의 활동 지역에서 따로 군정부를 세우는 일이라니. 김좌진도 어쩔 수 없었다. 거기다가 북만주를 더 이상 비워둘 수도 없었다. 외형상 신민부를 해체한 북만주는 무주공산이었다. 통합은 그만큼 지난했다. 김동삼의 말대로 다 내려놓고 그냥 뭉칠 수는 없었을까?  <김종해 한중우의공원관장/(예)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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