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독립군의 전설 김좌진

국내 진공 목표로…작전지도 제작·국민당 연합 시도

입력 2019. 12. 10   16:30
업데이트 2019. 12. 10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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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제5부 시련과 재기 ⑦ ‘향조국진군(向祖國進軍)’과 ‘항산항심(恒産恒心)’


유격대 국내 파견 작전지도 완성
일본군·경찰 주둔지·규모 등 파악
제1로 압록강-강계-평양 라인
제2로 함경도-강원-지리산 라인
전면전 염두 국내 진공작전 준비 

 
中 국민당과 비밀연합 시도
‘항일’ ‘반공’ 기치 세력 통합 시도
日 장작림 폭살…연합 실패로 끝나 

 
동포들의 생활 돌봄 계속된다
소학교 본교·지교 세워 가르치고
농장 만들어 경제적 기반 마련 꾀해 

 

현대화된 해림 조선족 실험소학교.
현대화된 해림 조선족 실험소학교.

애시당초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 김좌진의 목표는 하나였다. 일본군을 축출할 때 우리 힘으로 일본군과 싸워야 비로소 자주독립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신념과 혜안이 만든 ‘향조국진군(向祖國進軍)’ 그것이었다. 

 
무력(武力) 없는 항일의 한계는 결국 우리의 해방정국에서 현실로 드러났고 김구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광복군을 만들고 국내진공작전을 염원했던 이유도 같은 논리였다. 군이 강해야 나라와 국민의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역사가 증명하는 불변의 진리다.

김좌진은 ‘국내진공’을 위한 다양한 준비에 골몰했다. 1927년 8월에는 이중삼을 비롯한 ‘국내진입 유격대’를 편성, 국내로 파견해 장차 국내로 진입할 유격대와 국내진공작전에 필요한 작전지도를 만들어 오게 했다. 이 작전지도에서는 도로망보다 일본군과 경찰 등의 주둔지와 규모를 파악하는 게 중요했다. 대원들은 세 경로로 잠입해 임무를 수행했다. 제1로는 압록강을 건너 강계를 경유해 평양에 이르는 선이었고, 제2로는 백두산을 넘어 함경도·강원도·경상도를 거쳐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엄청난 거리의 지역 동태 파악이었다. 제3로는 두만강을 건너 경성을 경유해 북청에 이르는 길이었다. 파견된 특공대원들은 최정예 요원이었다. 이들은 거의 무지원으로 풍찬노숙의 정찰작전을 수행하며 놀랍게도 1·3로는 6개월, 2로는 1년여 뒤에 전원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다.

1·2·3로가 국경 좌·중·우측 지역처럼 보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작전지도의 쓰임새였다. 국내진공작전을 위한 1·3로 작전지도와 게릴라전을 위한 2로의 작전지도는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김좌진은 왜 이런 무리를 해가며 작전지도를 만든 것일까? 『한국독립운동사』(애국원호회)나 『이범석자전』, 『백야실기』 등을 보면 김좌진의 의중을 읽을 수 있다. 소규모 독립군을 모아 항일게릴라전을 치르는 것이 그의 목표가 아니었다. 국내진공작전은 거의 전면전 수준의 전쟁을 염두에 두었고, 이를 토대로 한반도 부분 점령(평원선으로 추정)과 나아가 일본 축출이라는 엄청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중국국민당과의 비밀연합을 시도하고 있었다. 국민당은 어찌 됐든 항일을 기치로 내걸고 있었고, 군벌 축출을 통한 전 중국 통일이 당면 과제였다. 그러나 당시 북평(현 북경)을 점령하고 있던 최대 군벌은 장작림이었다.

장작림은 1925년 2차 ‘직봉전쟁(직예군과 봉천군벌의 전쟁)’의 승리로 중국 제1의 실권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일장춘몽이지만 1927년 6월 마침내 ‘중화민국 안국군 육·해·공 대원수’라는 중국스러운 직위에 올랐다. 그러나 남쪽에서부터 북상해 오는 장개석의 북벌군은 풍옥상·염석산 등의 군벌들과 연합해 장작림을 압박해 들어오는 중이었다. 그때가 1928년 6월이다. 바로 그 전에 국민당은 장작림을 압박하고 동북에서 완전히 소멸시키기 위해 1928년 5월 김좌진과 연합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구국군(북벌군)’ 13군 사령관 양우일(풍옥상 계열)은 국민당 만주 지역 책임자 공패성을 통해 양병과 조직을 김좌진이 책임진다면 무기와 군수지원은 해 주겠다는 안에 서로 합의하게 된다. 김좌진은 만주 지역의 기존 세력을 규합하기로 했다. ‘항일’과 ‘반공’을 기치로 북만 지역의 중국 마적단까지 모두 항일전선에 통합세력으로 묶자는 생각을 했다. 이범석은 연락관으로 파견돼 이 통합에 동의한 규모만 6000여 명이 넘는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 연합도 실패하고 만다. 1928년 5월이면 장개석의 북벌군에 의한 북경 함락이 코앞이었다. 일제도 장작림이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장작림은 나름대로 자신의 본거지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움직임을 간파했다. 돌아갈 때 가더라도 집안 정리는 필요했다.

공패성을 전격 체포해 버렸다. 김좌진이 국민당과 손잡고 일본군과 싸운다? 김좌진이 이겨도 골치 아팠다. 일본군의 생리상 군대를 증파하지 않을 리 없었고, 장개석의 항일 명분에 장개석 편을 들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설사 일본군이 세력을 잃는다 하더라도 그 칼끝이 자신에게로 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러나 한 달도 되기 전 ‘만주 지역으로 돌아가라’는 장개석의 최후통첩을 받는다. 6월 3일 장작림은 북경의 상황을 정리하고 장개석군과 연결고리를 확보하기 위해 아들 장학량을 북경에 남겨두고 봉천(현 심양)으로 돌아가는 열차에 몸을 싣는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봉천 교외 ‘황고둔(皇姑屯, 황꼬우툰)’에서 6월 4일 새벽 5시23분, 일제가 설치한 폭탄에 의해 기차가 폭발해 죽는다. 급박하게 돌아간 당시 상황은 말 그대로 첩보영화 같은 긴박과 극적 반전 그 자체였다.

한편 김좌진은 이제 신민부 수장이었다. 동포들의 생활을 돌보는 것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김좌진이 신민부 수장이 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1927년 8월 1일 ‘북만한인교육대회’를 개최한 일이었다. 교육은 김좌진의 공적 활동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이때 결의된 내용이 주하·목릉·밀산·요하·돈화 등 15개 지역에 50여개의 소학교를 설치하자는 것이었다. 1927년 10월 31일 자 동아일보 내용이다. “북만주 이주 동포의 공평한 부담으로 불완전한 학교를 넷씩, 다섯씩 병합하여 6년제의 시설 완전한 본교를 두고 각처에 지교를 두어 만 7세 이상 14세 이하의 남녀 학생… (중략) 최근 중동선 부근에 있는 다섯 곳의 학교도 합병하여 ‘해림신창학교’를 본교로 하고 나머지는 지교로 하여 학교 건물을 신축하고 지난 25일에 성대한 개교식을 하였다는데, 이로써 귀의할 곳을 모르고 방황하던 동포 자제들도 배울 곳을 얻게 되었다더라.” 여기에서 나오는 ‘해림신창학교’가 지금도 남아 있는 ‘해림 조선족 실험소학교’다. 광복회장을 지낸 이강훈도 이때 밀산으로 파견된 교사 중 한 명이었다.

한편, 과거 국내에서 함께 활동한 ‘신현규’가 자금을 보내왔다. 이 자금이야말로 동포들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는 데 단비 같은 역할을 했다. 신현규는 광복회 사건으로 징역 7년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인물로 광복회에서 함께했던 손량윤·손봉현·김홍규·손호 등의 동지를 규합해 김좌진이 국내로 잠입시킨 이병묵과 함께 독립자금을 모집, 김좌진에게 보낸 것이다. 이때가 김좌진이 신안진 밀강에서 산시진으로 본부를 이전한 시기이며 그는 동포들을 위해 해림과 신안진 일대는 물론 산시 일대의 황무지(중국인에게는 늪 지대 같은 황무지이지만 우리 동포들에겐 물꼬만 잡으면 천혜의 수전을 펼 수 있는 곡창지대였다)를 불하받아 농장을 만드는 중이었다. 아마도 그 자금이 동포사회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해준 ‘정미소’를 만드는 데 종잣돈이 됐으리란 것을 어렵잖게 유추해 볼 수 있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김좌진의 역경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김좌진은 굴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았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자는 반드시 성공한다.


<김종해 한중우의공원관장/(예)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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