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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습 당한 신민부 와해 위기 속 군정-민정파 결국 결별

기사입력 2019. 12. 03   16:16 최종수정 2019. 12. 03   16:30

<46> 제5부 시련과 재기 ⑥ 고군분투, 그러나 신민부의 분열

신민부 1회 총회서 양병 방침 확정
이범석 소환해 성동사관학교 설립
1년도 채 안 돼 530여 명 병력 갖춰 

 
일본군-장작림 삼시협정 체결
들끓는 마적에 무법천지였지만
한인 보호·친일파 처단 이어가 

 
일본경찰, 1927년 신민부 본부 급습
군자금 들여온 핵심참모 유정근 체포
혼란 수습 와중에 조직 내부 분열
김좌진 중심 군정파가 신민부 주도 


김혁이 체포된 후 신민부 본부가 이전한 신안진 밀강촌.

무장투쟁을 제외하고는 김좌진의 독립운동을 말할 수 없다. 신민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민부는 민정 활동에 관여하는 9개 부서와 군사부를 두었는데 김좌진은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군정 활동을 총괄했다. 군대 양성과 무장력 구비는 김좌진이 걸머진 최대 과제였다. 

 
1925년 10월 신민부 1회 총회에서 관할 구역 내 18세 이상 38세 이하 한인 남성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군사강습소를 세워 전문적인 독립군 지휘관을 양성한다는 방침을 수립했다. 양병의 방침이 확정되자 김좌진은 중·러 국경지대의 백계 러시아 군사단체에 있던 이범석을 소환한다. 그리고 그전부터 눈여겨 봐두었던 목릉의 소추풍 지역을 직접 답사해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한다. 교장은 중앙위원장인 김혁이었으나, 실질적인 책임은 당연히 김좌진의 몫이었다. 성동사관학교 설립뿐만 아니라 예비 병력을 포함한 병력 보충을 위해 17세 이상 40세 미만의 남성들을 대상으로 ‘군적’도 작성하게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1년이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정규 병력만 530여 명으로 편성된 군대를 보유하게 됐다.

그러나 군대를 양성한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군대를 지속적으로 보유하고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돈이 문제였다. 최초 의무금을 징수해 충당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는 만만찮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미 대한독립군단을 편성했을 때도 그랬다. 북만주의 동포들도 이미 경신참변이라는 태풍이 휩쓸고 간 뒤라 예전 같지 않았다. 의무금 징수는 부진했고 타결책은 요원했다.

거기서 나온 방략이 ‘둔전제(屯田制)’였다. 독립군들이 훈련을 받으면서 논밭을 일궈 자급자족하는 한편, 농번기에는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는 군사훈련을 받게 하자는 것이다. 이미 신흥학교 출신들이 꾸렸던 ‘백서농장’도 그러한 형태였다. 그렇듯 경험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도 실패한다.

둔전 시행 지역으로 예정했던 ‘밀산’과 ‘안도’의 여건이 예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밀산은 이미 과거의 밀산이 아니었다. 공산주의가 확산돼 있었고 특히 기독교계의 반대가 심했다. 안도는 중국인 마적이 들끓었다. 농번기에는 화전을 일궈 옥수수를 심어 먹던 멀쩡한 농민이 옥수숫대가 시들고 나면 여지없이 마적으로 돌변했다. 도대체 믿을 놈이 없는 무법천지였다. 그런데 마적이야 신민부 별동대만으로도 소탕할 수 있었다. 문제는 절멸시킬 수 없는 마적에게 동포들이 입을 피해를 막을 길이 없었다.

이즈음 일제는 다시 한 번 계략을 꾸몄다. 수차 언급했듯 동북군벌 장작림은 세력 확장을 위해 친일과 민족주의 노선 위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한 인물이다. 그는 권력욕 외의 이데올로기는 찾기 힘든 인물이었다. 군벌싸움에서 헤게모니만 장악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못할 것이 없었고 그것이 대의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녹림대학(마적) 출신의 한계였다. 그가 일본의 제안에 덥석 손을 잡아 주었다. 1925년에 체결된 비밀협정, 이름하여 ‘삼시협정(三矢協定)’을 맺은 것이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三矢宮松)와 맺은 이 협정은 ‘불령선인 취체 방법에 관한 조선총독부와 봉천성의 협정’이라는 왜색 냄새 풀풀 나는 긴 이름을 가진, 말 그대로 독립운동가 절멸 협정이었다. ‘한국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면 반드시 일본영사관에 인계할 것과 인계 시 반드시 상금으로 대가를 지불한다’는 중·일 합작 탄압 선언이었다. 살아있는 한인을 잡아오면 20원이었다. 그런데 죽여 목을 가져오면 40원이었다. 마적들은 물을 만났고, 제대로 통제도 잘 안 되는 중국군은 아예 노골적이었다. 불편하게 살려서 끌고 갈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독립군이 명찰 달고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독립군 부대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장정들의 목이 달아났다. 무법천지도 이런 무법천지가 없었다.

그러함에도 한인들을 보호하고 독립군을 밀고하는 친일파를 찾아 처단해야 하는 것이 김좌진의 일이었다. 특히 1911년 용정에서 처음 만들어진 ‘조선인민회’는 일제를 대신하는 행정기관 행세를 하는 어용단체였다. 신민부의 본거지였던 해림에도 ‘배두산’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별동대가 처단했다. 아예 하얼빈 조선인민회를 습격하여 해체시켜 버렸다. 신민부는 중동선 일대의 조선인에게는 정부였고 민족의 구심점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비극이 또 한 번 발생한다. 1927년 2월 일제 경찰과 동북군이 석두하자에 있던 신민부 본부를 급습했다. 위원장 김혁을 비롯해 경리부 위원장 유정근,김윤희·박경찬 등 12명을 체포해 하얼빈 일본영사관으로 끌고 갔다. 유정근은 독립군단 군자금을 들여오는 김좌진의 핵심 참모였다. 워낙 은밀했던지라 손쓸 틈이 없었다. 신민부의 와해 위기였다.

이 혼란을 수습할 이는 김좌진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분열의 조짐이 생겼다. 이제 군정 부분을 포기하고 산업과 교육 등의 민사에 치중하자는 민사부위원장 최호를 중심으로 한 민정부가 김좌진의 노선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김좌진은 그랬다. 민사를 위해 군대가 있어야 하고 특히 삼시협정 치하의 동북에서는 더더욱 동포사회 보호를 위해서도 군대는 필요했다. 그리고 결정적 순간에 대비한 군사력이 없다면 자주독립은 절대 불가하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현실에 안주하고 타협하고자 하는 민정파는 더 이상 항일무장투쟁의 당위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1927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개최한 회의에서 군정부와 민정부는 완전히 결별하고 만다. 어차피 헤어질 거면 빨리 자기 노선을 찾는 것이 옳은 일일지도 몰랐다. 결국 신민부는 ‘군정파’가 주도하게 됐다.

김좌진은 중앙집행위원장 겸 군사부위원장을 맡으며 황학수(참모부위원장), 정신(경리 및 선전부위원장), 류현(실업부위원장), 백종렬(보안 제1대대장), 오상세(보안 제2대대장), 장종철(보안 제3대대장), 주혁(보안 제4대대장), 김종진(보안 제 5대대장 겸 군사부위원), 박두희(군사교육위원장) 등 간부진을 정비했다. 본부는 영안현 신안진(현재 해림시 신안진)에 두었다.

동지들이 실의에 빠져 망연자실할 때도 제대로 사태를 수습하고 다시 일어설 구심점이 있으면 망하지 않는다. 상해 임정의 김구가 그랬고 북만주에서는 김좌진이 그랬다. 그게 지도자다.

김좌진은 1925년 4월 7일 상해임정이 국무령제 헌법안을 통과시켜 대통령제에서 국무령으로 바뀔 때 초대 국무령 이상룡에 의해 ‘국무위원’(장관)에 임명된다. 그러나 취임하지 않았다. 북만주 항일무장세력의 통일전선 구축과 통합단체 설립이 더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김좌진의 신념은 자리가 중요하지 않았다. 백의종군을 한 이순신을 그래서 우리가 존경하는 것이다.  <김종해 한중우의공원관장/(예)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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