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독립군의 전설 김좌진

북만주에 신민부 수립… 삼부 중심 항일전선 구축

입력 2019. 11. 26   16:57
업데이트 2019. 11. 26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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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제5부 시련과 재기 ⑤ 신민부 창립과 삼부의 정립 
 
김좌진이 대한독립군단 재건할 무렵
中 동북지역 독립군 통합 기운 활발 
 
1924년 창설한 대한독립군정서와
1925년 1월 부여족통일회의 개최 

 
2달 가까이 통합 논의 진행 끝에
북만주 한인사회와 항일무장 이끌
자치정부 표방 군정부 신민부 창립
정의부·참의부와 함께 삼부 구성

삼부 관할 지역. 필자 제공
삼부 관할 지역. 필자 제공

통의부 군사훈련 모습.
통의부 군사훈련 모습.


김좌진이 절치부심 ‘대한독립군단’을 재건할 무렵 중국 동북 지역에서는 다시 독립군을 조직하고 이를 통합하고자 하는 기운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로써 간도 지방에서 항일의 기치를 내건 ‘불령선인’을 ‘초토화’하고자 했던 일본군의 의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한민족의 항일 열기는 2년 전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풀뿌리 같은 그 정신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 운동의 결실은 먼저 남만주 지역에서 움을 틔웠다. 1922년 봄 고구려의 졸본성 아래 동네 환인현에서 서로군정서와 대한국민단·대한독립단·광한단이 ‘남만통일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8월에는 나머지 단체들까지 통합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성립됐다. 비록 남만 지역이긴 하지만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이라는 숙원을 이룩했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거기까지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또다시 고질적인 노선 갈등이 불거졌다. 애초 통의부 결성에 중심 역할을 했던 전덕원과 양기탁의 갈등은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복벽과 공화라는 명분이 원인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다 감투싸움으로 감정이 더해지면서 추한 싸움으로 변한다. 전덕원 스스로는 복벽계가 중심이 된 통의부를 생각했으나 그의 의도와는 달리 공화계 인사들이 주요 직을 장악하게 되자 상호 불신은 극에 달했다. 이듬해 1월에는 상호 간 유혈 사태까지 발생했다. 통합하지 않느니보다 못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풀뿌리도 상생할 수 없는 천적이 있는 셈이었다. 이혼한 부부가 더 독하게 미워하는 법이듯 통의부의 갈등은 독립운동사에 아프게 기록돼 있다.

결국 전덕원 계열의 복벽주의자들은 1923년 2월 통의부와 결별하고 ‘대한의군부’를 설립했다. 그들은 의암 유인석의 충의정신을 계승했음을 천명하고 융희 연호를 사용하기로 하는 등 ‘복벽주의’ 그 자체였다. 그들은 의병 출신이 다수였다. 그런 연유로 나름의 대의명분과 전투력을 가지고는 있었다. 국내진격작전도 수행했다.

한편 통의부는 또 한 번의 분열을 겪는다. 공화주의자 중에도 자치활동에 중심을 두고자 했던 이들과 항일무장투쟁에 방점을 둔 이들의 갈등이 표면화됐다. 먼저 채찬 등 의용군과 유격대가 상해임정의 직속부대화를 내세우며 ‘육군주만참의부’를 결성하고 분리됐다. 압록강 변을 주 활동 무대로 삼고 관할 지역 내 지방조직까지 두었다. 통의부가 다시 세 갈래로 갈라진 것이다.

남만에서 통합과 분열이 거듭되는 가운데 상해 임정에서도 모든 독립운동단체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1923년 1월부터 독립운동사상 최대 규모의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됐다. 당시 통의부 총장인 김동삼을 의장으로, 안창호와 윤해를 부의장으로 선출해 의욕적으로 추진된 이 회의는 상해는 물론 미주·만주·러시아에 이르기까지 120여 명 이상의 대표가 참석해 뭔가가 이뤄지리란 희망에 들뜨기도 했다.

그러나 상해임시정부의 존속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에서 의견 충돌이 일어난다. 임정을 ‘개조’하여 존속시키느냐 아니면 아예 임정을 폐하고 새로운 정부를 ‘창조’하느냐의 문제였다. 무려 4달이 넘게 이 문제조차 풀지 못하자 김동삼을 위시한 만주지역 독립군 대표들이 사직한 후 돌아가고 말았다. 이 시기에 바로 상기한 전덕원 계열이 분열됐고 더욱이 임정과 통의부의 갈등도 심화됐다. 임정 계열의 참의부와 서로 살상까지 하는 통의부를 임정이 독립신문을 통해 신랄하게 비판하자 통의부도 임정에 척을 지고 말았던 것이다. 더욱이 통일회의에 참석한 재만 독립군 7개 단체가 임정과 독립신문에 통의부를 공격한 경위를 해명하고 반성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임정에 대한 반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임정의 권위도 말이 아니게 돼 버렸다.

분위기가 이렇게 흐르자 군소 독립군단체들이 주도해 다른 방향에서 통합을 논의한다. 여기에 찬성하여 서로군정서를 시발로 8개 단체가 통합하게 되는데 이것이 ‘정의부’다. 그러나 기존에 가장 큰 규모였던 통의부와 광정단이 통합을 미루다 마침내 1925년 3월 중순경 모든 독립적 사무를 정의부에 인계함으로 명실상부한 남만 최대의 독립군 통일단체가 성립됐다.

한편, 북만주에서는 러시아에서 돌아온 독립군들이 소규모로 집결해 나름의 독립군 부대를 꾸리고 있었다. 자유시 참변의 여파가 워낙 크기도 했지만 지역이 광대해 고만고만한 단체들이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러나 바람이 전하고 발품이 알아 온 소식들로 말미암아 과거의 동지들을 다시 결집시키는 데 오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됐다. 아직 대한독립군단에 소속되지 않은 단체도 여럿이었다.

지난 회에서 밝혔듯 대한독립군단의 활동에는 중국 동북 군벌의 견제와 공산주의의 확산이라는 또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좌진은 ‘대한독립군정서’의 현천묵·조성환·김규식 등과 북만주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머리를 맞댔다. 이들은 과거 왕청에서 김좌진이 군사부를 책임질 때 총재부 인사로 한솥밥을 먹던 동지들이다. 당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할 때 참여하지 않고 있다가 1924년 3월 동빈현에서 별도로 대한독립군정서를 막 창설했던 것이다. 김좌진이 대한독립군단을 창설할 당시 이들이 같이 참여하지 않은 연유는 알 수 없다. 그들도 북로군정서 계열에서 무장투쟁을 통해 일제를 축출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김좌진과 노선이나 이념에서 이질성을 찾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개별적으로 군소단체를 조직해 통합하는 것보다 대표성을 지닌 통합된 두 개의 단체가 결합하는 것이 오히려 수월했다. 그 결과 북만주에서도 1925년 1월 목릉현에서 ‘부여족통일회의’를 개최할 수 있었다. 이 논의는 두 달 가까이 소요됐다. 마침내 1925년 3월 10일 영안에 모인 두 단체는 군정부(軍政府)인 ‘신민부(新民府)’ 창립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여기에 중동선교회를 비롯한 16개 지역대표와 국내의 대표들까지 참여했다. 북만주 한인사회를 이끌고 항일무장투쟁의 최전선에 설 명실상부한 자치정부를 표방하는 단체가 탄생한 것이다.

당시 통의부가 중심이 됨으로써 상해 임정을 반대한 정의부와는 달리 신민부는 1920년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가 그랬듯 결의안에 ‘민국연호’를 사용한다고 명기해 상해 임시정부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도 분명히 했다. 집행위원장에는 김혁을 지명하고 김좌진은 중앙집행위원 겸 군사부위원장을 맡았다.

일제의 ‘불령선인초토계획’에 의한 ‘경신참변’과 소련의 이중적 태도로 참혹한 피해를 본 ‘자유시 참변’을 겪으며 완전히 기세가 꺾일 것 같았던 독립투쟁의 열기는 이렇게 다시 타올랐다. 우여곡절 끝에 좌측으로는 정의부가, 압록강 연안으로는 참의부가, 그리고 북만주 지역에는 신민부가 수립됨으로 삼부 중심의 항일전선 구축에 성공했다. 그러나 우여곡절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음을 이때까지는 아무도 몰랐다.

<김종해 한중우의공원관장/(예)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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