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독립군의 전설 김좌진

일본과 독립군 무장해제 밀약, 항일무장투쟁 최대비극 겪어

입력 2019. 11. 12   17:08
업데이트 2019. 11. 12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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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제5부 시련과 재기 ③ 흑하사변(자유시 참변)


우수리강 건넌 독립군 3000여 명
러 적군-백군 간 완충지대 이만 집결
‘대한독립단’으로 지휘부 재조직
김좌진 총사령관 격 참모부장 맡아

 
러, 자유시로 이동·무장해제 요구
배후 음모 간파 김좌진 반대에도
부대 통솔권 놓고 갈등에 속수무책

 
장갑차·기관총 총무장한 적군
무장해제 반대자 통제 빌미로
역 창고로 독립군 몰아붙여 공격



흑하시에서 바라본 러시아 블라고베시첸스크시. 그날의 비극이 무색하게 흑룡강은 무심히 흐른다.
흑하시에서 바라본 러시아 블라고베시첸스크시. 그날의 비극이 무색하게 흑룡강은 무심히 흐른다.



청산리대첩의 영웅들이 건너간 이만(伊曼)은 그들이 상상한 땅이 아니었다. 충분한 군수와 무한정의 무기와 탄약을 약속했던 노농정부가 오히려 일본군을 대신하고 만다. 독립군사에 가장 참혹한 사건인 ‘자유시 참변’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


이만은 당시 러시아 적군(赤軍, 볼셰비키파)과 백군(白軍, 차르파) 간의 묵시적 완충지대였다. 그만큼 행동도 자유로웠다. 당시 러시아는 1917년에 일어난 ‘10월혁명’ 후 3년이 경과했지만 여전히 내전 중이었다. 중앙정권이 바뀌었다고 모두가 레닌정부에 복종하진 않았다. 구체제에 동조하는 백군은 기존의 전투력을 고스란히 보존한 말 그대로 명실상부한 군대였다. 이 내전 기간의 적·백군 간 사상자가 1차 대전에 참전해 입은 피해를 능가할 정도였다. 그 마지막 전장이 연해주 흑룡강과 우수리강, 그리고 송화강이 만나는 삼강평원 일대였다.

얼어붙은 우수리강을 건너 이만에 집결한 독립군은 3000명이 넘었다. 밀산에서 원소속 부대 편제를 유지한 채 러시아로 이동했지만 이탈 인원이 거의 없었다. 무사히 이만에 도착한 독립군들은 ‘대한의용군 총군부’로 다시 재통합을 한 후 명칭을 최종적으로 ‘대한독립단’으로 확정하고 지휘부를 재조직했다.

총재는 서일을 그대로 추대하고 홍범도를 부총재로, 백순과 김호익을 고문으로 선정했다. 그리고 대외적인 교섭 창구로 외교부장직을 신설해 최명록을 선출했다. 가장 중요한 군사 부분에는 총사령관 격인 참모부장에 김좌진을, 참모로 이장녕·나중소를 선임했다. 지청천은 군사부 고문을 맡았다. 그리고 휘하 제1여단장에는 김규식, 1여단 참모로 박영희, 제2여단장에 안무, 2여단 참모로 이단승, 2여단 기병부장에 강필립을 각각 선임했다. 마침내 만주와 연해주를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독립군 통합부대가 창설됐다. 이때까지는 좋았다. 곧 약속대로 ‘원동공화국’(소련의 연해주지방 행정구)으로부터 충분한 군수지원이 이뤄지고 일제와 전면적인 전쟁을 치를 일만 남은 듯 보였다.

그러나 이때 한인부대 통솔권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러시아 지역에는 두 개의 사회주의 계열의 단체가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는 기존의 연해주 한인사회를 대표하던 ‘국민의회’와 ‘이르쿠츠크파’의 지원을 받는 ‘고려혁명군’이었고, 또 하나는 임시정부와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지원을 받는 ‘대한의용군 총사령부’였다. 이들은 서로 반목했다. 두 단체 모두 지원의 연결고리 역할을 빌미로 대한독립단을 자신의 휘하에 두고자 했다. 이 와중에 러시아 원동정부는 완충지대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통제 가능 구역인 블라고베시첸스크 지역(정확히는 ‘자유시’로 불리는 스보보드니)으로 부대를 이동하라고 요구했다. 거기에다 이동 시에는 무장을 해제하라는 요구까지 곁들였다.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김좌진은 처음부터 음모가 배후에 있음을 간파했다. 국민의회의 문창범과 자유대대의 오하묵이 자유시 일대에 주둔지를 둔 것부터 명백하게 러시아내전에 참여해 싸우라는 것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전에 휘말릴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거기에다 무장해제라니 이는 무기를 장만해준 동포들에 대한 배은망덕이었다. 김좌진·김규식·이범석 등은 절대불가라며 반대했다. 반면 홍범도·지청천·안무·최진동 등은 그래도 믿을 건 러시아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자유시를 향해 떠났다. 그렇게 이동해간 독립군들은 적군 29연대에 의해 무차별 학살을 당한다. 이것이 ‘자유시 참변’이라 불리는 항일투쟁사 최대의 비극적 사건이다.

이 사건을 다시 되짚어 보자. 원동공화국이 자유시에 주둔지를 마련한 것은 진짜 약소민족의 독립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실상은 백군과의 내전에 무장력과 전투력을 지닌 독립군들을 전위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적군은 백군에 비해 절대적 우위권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고아 같았던 독립군의 존재는 충분히 유용했다.

그러나 상황이 변하고 있었다. 차르는 이미 살해됐고, 중앙통제가 불가능했던 백군은 각개 격파당하며 급격히 와해돼 갔다. 심지어 마적단과 다름없는 형태로 변해 있었다. 거기에다 체코군단의 안전 철수라는 명목이었지만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연해주로 파견됐던 제국주의 군대들도 레닌정부의 존재를 인정하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가장 많은 병력을 파견한 일본군의 철수는 완전 적화를 위한 필수 요건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순순히 물러날 일본이 아니다. 볼셰비키들이 독립군을 연해주에 묶어놓고 소멸시켜준다면 ‘불령선인초토계획’의 실패를 만회하고도 남는 장사였다. ‘이이제이(以夷制夷)!’ 갈 길 바쁜 볼셰비키들에게 애시당초 한국독립군은 이용의 대상이지 인류애의 발현 대상이 아니었다. 불러들이기보다 버리기가 더 쉬웠다. 자유시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본군과 싸우기도 하고 백군부대와 싸우기도 했다. 그랬지만 그런 것들이야 관심의 대상도 아니었다.

일본은 북경에서 레닌정부와 밀약을 맺었다. 철군과 캄차카반도의 연안 어업권을 제시했다. 그 대가로 요구한 것이 독립군의 무장해제였다. ‘소련은 자국 영토 안에서 일본에 대해 적대 행위를 하는 한국독립군을 육성하거나 보호하지 않는다’는 합의서, 볼셰비키 정부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내전이 마무리돼 가는 상황에서 별도의 외인부대를 두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고, 더욱이 일본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독립군의 존재는 목에 걸린 가시였다. 현실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를 외면했거나 몰랐다.

김좌진의 입장에서는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었다. 대세가 자유시 이동으로 결정되자 군령을 쥐고 있던 김좌진으로서도 속수무책이었다. 애초 각각 다른 부대의 결합이다 보니 대세에 따라 의견은 분분했고 갈등은 여전했다. 더욱이 대한독립단을 장악하고자 했던 오하묵 등이 주도하는 고려혁명군에게 ‘민족’이란 개념은 이념적으로 말살돼야 할 허위의식에 불과했다. 볼셰비키즘에 투철함이 우선이었다.

레닌정부는 이를 교묘히 이용했다. 대한독립군 중 무장해제를 반대하는 부류의 통제를 빌미로 스보보드니 역 창고로 독립군을 몰아붙였다. 1921년 6월 28일 오후 4시, 장갑차 2대에다 30여 문의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적군 29연대와 코사크 기병 600여 명이 증강된 대부대가 대한독립단 부대가 주둔한 ‘슬라보스크’를 무차별 공격했다. ‘제냐강변’에 위치한 자유시 역 창고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1시간여의 눈물겨운 저항 끝에 전사자 272명, 익사자 31명, 행방불명 250여 명, 포로 917명이라는 참담한 피해를 입고 대한독립군은 거의 궤멸되고 만다. 지청천 등도 구금됐고, 홍범도는 휘하 300여 명을 데리고 이르쿠츠크 소련군 제5군단 합동민족여단 대위 신분으로 편입됐으나 1923년에 바로 군복을 벗는다.

김좌진이 반공 노선을 걷게 되는 결정적 사건이기도 했다. 내가 힘이 없으면 결코 남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냉혹한 국제질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유효하다.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예비역 육군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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