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

전쟁 치른 파키스탄과 국기강하식 기싸움 치열

입력 2019. 11. 12   16:15
업데이트 2019. 11. 12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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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인도(상)


철책선 양쪽 수천 명 응원단이 상대편 자극…괴성으로 귀신 흉내내기에 알통 자랑까지
두 차례 전쟁 이어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으로 3차 전쟁…종교 간 엄청난 혈전 벌어져

뉴델리 전몰용사 추모탑 ‘인디아 게이트’ 전경.
뉴델리 전몰용사 추모탑 ‘인디아 게이트’ 전경.

남부 아시아의 인도는 1857년 무굴제국이 멸망한 뒤 영국식민지로 편입됐다.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영국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힌두권인 인도와 이슬람권인 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했다. 인도는 파키스탄과 세 차례, 중국과는 한 차례 전쟁을 치렀다. 현재도 카슈미르지역 영유권 문제로 파키스탄과 수시로 갈등을 빚고 있다. 인도 인구는 13억6000만 명(세계 2위)이며 국토 면적은 329만㎢로 한반도의 15배에 달한다. 언어는 영어 외 15개의 공용어가 있으며 국민 연 개인소득은 1500달러 수준이다. 군사력은 현역 139만5050명(육군 120만, 해군 5만8300, 공군 12만7200, 해안경비대 9550명), 준군사부대 140만3700명을 보유하고 있다.
뉴델리 ‘인디아 게이트’와 간디 기념관

인도 수도 뉴델리 중심부에 일직선으로 길게 뚫린 도로 끝의 웅장한 ‘인디아 게이트(India Gate)’는 이 도시의 상징물이다. 이 건축물은 제1·2차 세계대전,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위한 추모탑이다. 높이 42m 아치형 구조물에는 수십만 전사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근처 공터에는 2020년 완공 예정인 인도 군사박물관 공사가 한창이다.

또 시내의 간디·네루 기념관에는 인도 근·현대사와 독립과정이 잘 정리돼 있다. 1918년 1차 대전은 끝났지만, 영국의 수탈은 더욱 심해졌다. 마침내 1920년 8월, 인도 국민회의 지도자 간디는 비협력·비폭력 운동을 선언했다. 민중에게 호소한 지침은 “다른 사람을 해치지 마라. 적에게 친절히 대하라. 음주·마약·도박을 근절하라. 각자가 물레를 돌리고 외국산 옷감을 입지 마라”는 것이었다. 간디의 호소에 많은 민중이 동참했고, 결국 인도는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간디 기념관과 묘역은 매일 수많은 학생과 관광객들이 찾는다. 특히 간디의 유일한 유산인 ‘지팡이 한 개와 낡은 신발 한 켤레’는 진정한 지도자의 표상처럼 보였다.


암리차르 인·파 전쟁기념관 상징 조형물.
암리차르 인·파 전쟁기념관 상징 조형물.


세 차례 인·파 전쟁을 증언하는 공군박물관

1947년 독립 때부터 인도·파키스탄은 전쟁의 불씨를 안고 있었다. 영국은 종교 갈등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분할지배’ 방식으로 거대한 인도를 식민통치해 왔다. 결국, 양국의 인위적 분할은 수백만 민족 대이동을 수반했고 그 과정에서 두 종교 간 엄청난 혈전이 벌어졌다.

뉴델리 국제공항 근처에 세 차례의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공군박물관이 있다. 이 도시 유일의 군사박물관이지만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1947년 7월부터 1949년 1월까지 국경 지역에서 제1차 전쟁이 있었다.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은 무장 부족의 인도령 카슈미르 공격과 양국 정규군 간 전투가 있었으나 유엔의 중재로 겨우 휴전했다.

1964년에는 인도·중국 간 히말라야의 영유권 전쟁이 일어났다. 인도가 전쟁에 휩싸이자 1965년 8월, 파키스탄이 인도의 뒤통수를 치는 제2차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파키스탄-중국, 인도-소련이 외교적으로 밀착하는 계기가 됐다. 1971년 12월 3일, 방글라데시 독립으로 제3차 전쟁이 발발했다. 파키스탄 공군은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전격전을 본떠 석양을 이용해 인도 공군기지를 기습했다. 그러나 파키스탄 공군의 실력은 한계가 있었다. 튼튼한 격납고 속의 인도 전투기를 격파할 수 없었고, 어둠으로 재출격 기회조차 잃었다. 더구나 인도의 소련제 공중조기경보통제기(AWACS)는 450㎞ 거리에서 이미 적기의 활동을 낱낱이 지켜보고 있었다.



국경도시의 분단박물관과 시크교 황금사원

뉴델리에서 기차로 14시간 걸려 북부 국경도시 암리차르에 도착했다. 이 도시의 분단박물관은 1947년 대규모의 인구이동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인위적 국경 설정으로 힌두교인은 인도로, 이슬람교도는 파키스탄으로 삶의 터전을 버리고 대대적으로 이주했다. 이웃은 증오의 대상으로 변했고, 마을이 불타고, 상점은 약탈당했다.

또 이곳에는 시크교도의 성지 ‘황금사원’이 있다. 성지에 입장할 때는 발을 깨끗이 씻고 맨발로 들어가야 한다. 하얀 건물 옆의 넓은 호수에는 시크교도들이 물속에 들어가 회개 기도를 드린다. 곳곳에 터번을 쓰고 창을 든 안내병사들이 관광객들에게 순례자 급식소에서 점심까지 함께할 수 있다며 친절하게 알려준다. 그러나 이때 먹은 공짜 음식이 대형 사고를 일으킬 줄이야.


국경검문소 국기강하식에서 볼 수 있는 인도 의장병들의 제식동작.
국경검문소 국기강하식에서 볼 수 있는 인도 의장병들의 제식동작.

양국 응원전 속의 희한한 국기강하식

암리차르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의 ‘와가’ 국경검문소에서는 매일 오후 5시 인도·파키스탄군의 희한한 국기강하식이 시작된다. 철책선 양쪽에서 수천 명의 응원단이 경쟁적으로 소리치며 상대편을 자극한다.

인도군 진영에서 키 190㎝의 여군 2명이 기관단총을 비껴 메고 당당하게 국경 철문 앞으로 나간다. ‘인도는 여군만으로도 파키스탄을 제압할 수 있어!’라는 분위기 조성이다. 뒤이어 닭 볏 군모를 쓴 의장병들이 다리를 쭉쭉 뻗으며 행진하고 광장형 도로 안에서는 관람객들의 춤판까지 벌어진다. 건너편 파키스탄 진영에서도 이에 뒤질세라 검은 군복의 의장병들이 응원단의 광기 어린 함성 속에서 군홧발을 땅에 꽝꽝 찍으며 철문에 다가선다.

오후 5시 정각, 철문이 열리자 본격적으로 ‘상대편 기죽이기 시합’이 펼쳐진다. 양측 병사의 팔 ‘알통’ 자랑, 머리끝까지 다리 치켜 올리기, 괴성으로 귀신 흉내 내기 등등. 드디어 국기 강하가 끝나면서 양측 병사의 ‘번개 악수’가 있었다. 사실 악수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상대 손바닥을 힘껏 친다. 방심하다 넘어지면 국가가 쓰러지는 것이다. 이 병사들은 틈만 나면 아귀힘을 기르는 훈련을 했으리라.

암리차르행 국도 옆에는 인·파 전쟁기념관이 있다. 하늘 높이 솟아있는 긴 칼 조형물은 양국 간 그칠 줄 모르는 분쟁 역사를 상징하는 듯했다. 숙소로 돌아오니 아랫배가 살살 아파 온다.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면서 지독한 ‘인도설사병’임을 알게 됐다. 비상 구급약을 먹어도 통제 불능이다. 나중에는 오한까지 따라와 두툼한 점퍼를 입어야만 했다. 황금사원의 순례자 급식이 문제인 것 같았다. ‘공짜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인도 답사 내내 뼛속 깊이 새겨야만 했다. 사진=필자 제공

<신종태 통일안보전략硏??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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