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

여자군사학교, 최상위 수재 모아 군사훈련

입력 2019. 11. 05   16:51
업데이트 2019. 11. 05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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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방글라데시(하)


공군박물관으로 현장학습을 온 여자군사고등학교 생도들.
공군박물관으로 현장학습을 온 여자군사고등학교 생도들.


세계 최빈국 방글라데시는 유엔 자료에 따르면 1시간에 28명의 어린이가 죽고 극빈·굶주림 속에서도 매일 3000명의 신생아가 태어난다. 해마다 홍수·사이클론으로 하천 범람은 일상화돼 있다. 1987년에는 전국의 75%가 물바다가 됐다. 1971년 독립 이후 함량 미달인 정치지도자들의 좁은 안목으로 사회 혼란은 계속됐고 빈부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1990년대 초 민주정권이 들어섰지만, 실업률은 거의 50%에 달한다. 하지만 이런 사회 혼란 속에서도 방글라데시는 수도 다카에 군사박물관·공군박물관·독립역사기념관·독립기념공원을 건립했다. 특히 국가 자긍심 고취, 군의 위상 강화를 위해 군사·공군박물관은 대규모 신축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한국 교민이 말하는 방글라데시 노동자 삶

호텔의 아침은 통상 뷔페식당으로 몰려오는 손님들의 수다로 시작된다. 다른 투숙객들과의 만남을 상상하고 식당으로 갔으나 아무도 없었다. 대신 종업원이 메뉴판을 내민다. 식수 인원이 한 사람뿐이라 부득이 주문을 받는다고 한다. 찬찬히 호텔 주변을 돌아보니 출입구의 거대한 철창 옆에 24시간 경비원이 앉아있다. 결국, 그저께 만난 K 씨의 도움으로 한인 민박집으로 숙소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민박집 주인 J 씨는 1980년대 방글라데시로 이주해 봉제공장을 차렸다. 100여 명 종업원의 인건비가 워낙 저렴해서 그럭저럭 회사 운영은 잘됐다. 2006년 기준 다카에는 2500개 공장에서 180만의 노동자들이 일했다. 90%가 여성들이었고 이들의 평균 월급은 14달러에 불과했다. J 씨 회사 여공들의 절반이 점심을 거르며 수돗물로 배를 채웠다. 오후 작업시간에 쓰러지는 어린 소녀들이 속출했다. 급기야 회사는 직원들에게 무료 점심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는 현재 의류사업을 접고 한인 식당과 여행자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다. 아파트 2개 층을 개조해 살림집과 방문자 숙소로 만들었다. 민박집 운전기사·청소부·요리담당 현지인 급여는 월 100달러 수준. 한인 식당에도 별도의 종업원들이 있었다. 이처럼 세계 구석구석으로 나간 한국인들의 개척정신과 근면함이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우뚝 서게 한 밑거름이 된 것 같았다.


다카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공군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소련제 미그기.
다카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공군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소련제 미그기.

방글라데시 독립전쟁과 적극적인 PKO

시내 중심부의 군사박물관은 대대적인 신축 공사로 어수선하다. 야외에는 소련제 야포·탱크와 군용 차량이 늘어서 있었고, 임시 건물인 전시관엔 독립전쟁과 평화유지활동(PKO) 자료들이 많았다.

1971년 3월 25일, 동파키스탄의 정치적 자유 요구를 서파키스탄이 거부하면서 유혈 충돌이 최초로 벌어졌다. 정부군을 이탈한 벵골 출신 군인·경찰들이 ‘해방군’을 결성했다. 전 국토가 전쟁터로 변하자 800만 난민이 인도로 탈출했다. 인도 정부는 난민 문제 해결책으로 방글라데시 독립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판단했다. 11월 21일, 인도군 20만 병력이 벵골 지역으로 진격했다. 12월에는 벵골만에 항공모함을 투입해 서파키스탄군을 공격했다. 뒤이어 1500㎞ 떨어진 인도·파키스탄 국경 카슈미르에도 전쟁 불똥이 튀었다. 이것이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다. 1971년 12월 17일 서파키스탄군이 항복했고, 방글라데시는 독립 국가로 탄생했다.

박물관 공사장 경비책임자 ‘모하드’는 헌병부사관으로 전역했다. PKO 요원으로 이라크·쿠웨이트에서도 근무했다. 연인원 13만 명의 방글라데시군이 PKO로 파병됐다. 유엔 기금으로 지원되는 PKO의 높은 급여가 방글라데시인들에게는 큰 매력이라고 했다.


독립전쟁 당시 참전한 방글라데시 여성들이 분열(分列)하는 모습.
독립전쟁 당시 참전한 방글라데시 여성들이 분열(分列)하는 모습.

여자군사고등학교 생도들의 현장학습

군사기지와 붙어있는 공군박물관 주변은 개발 붐으로 정신이 없다. 택시기사는 기지 울타리를 2~3바퀴 돌다가 겨우 임시 정문을 찾았다. 공군박물관은 방글라데시 국기가 그려진 미그전투기가 줄지어 있었고, 실내 전시관은 아예 없었다. 방글라데시군을 지원하는 인도군이 주로 소련제 무기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박물관 관리관 ‘주디’는 18년 근무경력의 공군상사였다. 입장권 구매 시 유일한 외국 사람인 필자를 보고선 직접 야외전시장을 안내했다. 이 나라에서 직업군인은 사회적으로 가장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단다. 하지만 자신은 연금대상이 되면 전역하고 기필코 한국에 가서 재취업하고 싶단다. 영어 능통, 회계사 자격, 컴퓨터 전문가 등 다양한 경력을 내세운다. 다카 한국대사관 비자 담당을 만나라는 조언밖에 할 수 없었다.

이때 50여 명의 군복 차림 여고생들이 버스에서 내렸다. 인솔 교사는 현역 군인이다. 관리관 말에 따르면 여자군사고등학교 생도들이라고 한다. 방글라데시의 14개 군사 고교 중 4개는 여학교란다. 정부의 다양한 지원을 받는 이 학교는 중학교 졸업생 중 최상위 수재들만 입학할 수 있단다. 기숙사 생활과 군사훈련을 병행하지만, 졸업 후 자유롭게 군대나 일반 대학을 선택할 수 있다. 비록 가난한 방글라데시이지만 우수 인력을 호국 간성으로 미리 확보하자는 국가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또한, 그들은 수백만 동족이 도살됐던 독립전쟁의 교훈을 절대로 잊지 않고 있었다.



낙후된 출입국관리체계로 당한 낭패

2018년 10월 이후, 한국인은 인도 공항에서 도착 비자를 받을 수 있다. 방글라데시 답사 후 인도행 비행기 탑승을 위해 다카공항으로 갔다. 출국장 역시 혼잡했고 항공 예약표를 보여줘야만 터미널 입장이 가능하다. 발권 카운터에서 여권을 내밀며 티켓을 받으려니 인도 비자가 없어 탑승이 불가하단다. 변경된 비자 규정을 설명해도 전혀 모른다. 출입국사무실로 갔지만, 공무원도 일본인만 인도 도착 비자가 가능하단다. 옥신각신하던 중 비행기가 출발하면서 숙소 예약비까지 날아가고 말았다. 인도 혹은 한국대사관에 가서 후속조치를 하란다.

공항 청사를 나오니 이번에는 경찰관이 붙잡는다. 항공기를 타지 않고 다시 나온 점이 수상하단다. 간이 파출소 안 모기들은 유독 필자에게만 달려든다. 한국인임이 확인되자 금세 그의 태도가 달라졌다. 결국, 다음 날 한국대사관 영사의 도움으로 겨우 다카공항을 떠날 수 있었다. 비자 규정 변경 내용을 세관 공무원들조차 몰랐던 것이다. 낙후된 행정시스템으로 엉뚱한 여행객만 피해를 본 것이다. 사진=필자 제공

<신종태 통일안보전략硏??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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