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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귀국 > 러시아 혼란 > 동부전선 평정’ 속셈

기사입력 2019. 05. 21   16:11 최종수정 2019. 05. 21   16:14

<68> 1917년 3월 말 독일군 수뇌부는 왜 레닌에게 밀봉 열차를 제공했을까?(下)

레닌 8일 3200㎞ 극적 여정 끝 ‘4월 테제’ 기본골격 구상
정권 장악하고 공산국가 수립 착수…獨과 강화조약 체결도
독일 레닌 이용 러시아 혼란 유도…처칠 “악성병원균” 평가
동부전선 대립은 끝냈으나 서부전선 공세 실패로 결국 항복 

 

밀봉 열차를 타고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 역에 도착해 군중의 환영을 받는 레닌.
독일군이 레닌에게 제공한 밀봉 열차.

그렇다면 장기간 해외에 체류하다가 귀국 몇 개월 만에 지지층을 결집, 정권까지 장악한 레닌은 어떤 인물일까? 그는 1870년 볼가강에 연한 작은 항구도시 심비르스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세습 귀족이자 장학관이었기에 어린 시절은 나름대로 유복했다고 볼 수 있다. 평탄하던 그의 인생에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전개 과정-2월 러시아 혁명으로 망명 생활 청산하고 귀국 추진

형 알렉산드르가 차르 알렉산드르 3세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처형당한 것이다. 당시 23세로 카잔대학 법학과에 재학 중이던 레닌은 이를 계기로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혁명가의 길로 들어섰다. 반정부 활동 중 1895년 12월 차르 경찰에 체포돼 1년여의 수감생활 후 3년간 시베리아에 유배됐고, 1900년 2월 풀려난 그는 서유럽행을 택했다. 이후 문필가이자 직업 혁명가로 거의 17년 동안 해외에서 볼셰비키 세력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당시 레닌과 그의 동료들은 러시아를 변혁할 혁명가를 자처했으나, 실상은 초라한 떠돌이 망명객에 불과했다.

1917년 봄, 여전히 전쟁의 불꽃이 타오르는 상황에서 중립국 스위스의 취리히는 유럽 각지에서 몰려온 다양한 부류의 인파로 북적였다. 당시 취리히에는 반체제 인사를 보호해주는 관습이 있었다. 따라서 이곳은 혁명 목표와 달성 방법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즐긴 유럽 좌파 급진주의자들의 임시 고향이자 도피처 역할을 했다. 이들 중 공공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틈날 때마다 숲을 산책하는 강렬한 인상의 한 중년 사내가 있었다. 바로 레닌이었다. 유럽 각지를 전전하던 레닌도 1916년 초 이 도시로 들어왔다. 평생 일정한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던 그는 책을 쓰고, 간혹 다른 사상을 가진 지식인들과 격렬한 정치토론을 벌이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러시아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을까 우려하던 레닌에게 어느 날 깜짝 놀랄 소식이 전해졌다.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진압을 명령받은 페트로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수비대가 노동자 파업에 동참해 총부리를 차르 정부 쪽으로 겨눴다는 얘기도 들렸다. 러시아 상황이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감지한 레닌은 어떻게든 러시아로 돌아가 혁명에 동참하려고 했다. 하지만 무슨 수로 그곳까지 간단 말인가! 취리히는 페트로그라드에서 수천㎞나 떨어진 데다 중간지대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중해로 우회할 수도 없었다. 독일 진영에서 싸우는 오스만튀르크가 건재했기 때문이다.

이때 의외의 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왔다. 스위스인 동료 혁명가를 통해 접촉한 독일군 수뇌부가 페트로그라드행을 지원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그동안 레닌이란 혁명가의 활용 가치를 예의 주시하던 독일군이 그에게 일생일대의 전기를 마련해준 것이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밀봉 열차’였다. 말 그대로 창문을 모두 가린 특별 열차에 레닌과 핵심 볼셰비키들을 싣고 취리히를 출발, 독일을 종단한 후 중립국 스웨덴을 거쳐 핀란드를 통해 페트로그라드로 들어간다는 계획이었다. 적대국 독일은 이들의 안전 통과를 보장했고, 레닌의 요구대로 국제법상 치외법권까지 인정해줬다.

드디어 1917년 3월 28일(당시 제정 러시아의 율리우스력 기준) 오후 3시쯤 취리히 중앙역에 레닌과 그의 부인을 비롯한 총 32명이 러시아로 잠입하기 위해 밀봉 열차에 올랐다. 아무리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닌 냉혈한이라고 하나 일생일대의 모험 길에 오르는 레닌의 얼굴에도 긴장의 빛이 역력했다. 적대국 독일을 통과할 때 체포되지 말란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정이 이어지면서 이들의 불안감은 어느 정도 해소됐다. 독일 군부나 레닌이나 서로를 이용하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일행은 격리된 2등칸 객실에서 평안히 머물렀다. 물론 이 와중에도 레닌의 정신은 살아 움직였다. 이동 중 그는 자국민들을 깜짝 놀라게 할 이른바 ‘4월 테제’의 기본 골격을 구상했다.

잠입 작전은 성공이었다. 드디어 8일간 약 3200㎞를 내달린 극적인 여정 끝에 1917년 4월 3일 밤 11시쯤 레닌 일행을 태운 열차가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 역에 도착했다. 그동안 필명과 소문으로만 접한 레닌이 대기하고 있던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볼셰비키 군악대가 연주하는 ‘라 마르세예즈’의 음률과 함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볼셰비키 혁명을 향한 문이 열린 것이었다.

왜 독일군 수뇌부는 레닌에게 귀국 길을 열어줬을까?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을 ‘부르주아의 음모’이자 자본주의 국가끼리의 충돌로 규정하고 독일과의 즉각적인 평화를 주장해온 레닌을 들여보내 러시아 내부를 혼란에 빠뜨림으로써 미군이 유럽 전선에 도착하기 전 동부전선을 평정할 속셈이었다. 이후 그곳의 독일군을 몽땅 서부전선으로 이동시킨 후 총공세를 감행,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한다는 계산이었다. 이를 위해 가능한 한 빠르게 러시아를 붕괴시키는 것이 관건이었다. 전후의 한 연설에서 윈스턴 처칠은 레닌의 귀국을 독일이 러시아로 ‘악성 병원균’을 들여보낸 것으로 평가했다. 레닌과 그 일행을 열광적으로 맞이한 군중은 전혀 감지하지 못했겠지만, 독일군이 의도한 대로 러시아에 치명적인 세균이 배달된 셈이었다.


역사적 영향- 독일의 항복과 미몽에 그친 사회주의 이상 사회

독일군 최고 사령부의 비책은 성공했을까? 귀국 후 민심의 동향을 간파한 레닌은 평화, 빵, 토지 그리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4월 테제’를 천명하면서 빠르게 입지를 다졌다. 이후 한 차례 쿠데타 실패를 겪은 뒤 마침내 10월 25일 볼셰비키 무장대가 임시정부 청사인 차르의 동궁(冬宮)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정권을 장악한 레닌과 볼셰비키는 곧 공산국가를 수립하는 과업에 착수했다. 무엇보다 레닌은 그간 자신이 주장한 대로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으려고 움직였다. 폴란드·우크라이나·핀란드 등 약 70만㎢에 달하는 러시아의 유럽 쪽 영토 대부분과 50억 마르크의 배상금 등 독일 측의 무모한 요구조건에 볼셰비키 대표단은 울분을 토했으나, 결국 1918년 3월 초 독일과 일명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전선에서 이탈했다. 독일군이 그토록 바라던 동부전선에서의 전쟁 종식이 성취됐다. 밀봉 열차를 이용한 모험은 일단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환호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동부전선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이동해 펼친 대공세가 실패하면서 독일은 더 버티지 못하고 1918년 11월 초 항복하고 말았다. 불과 8개월 전 강화조약으로 손에 넣었던 막대한 전리품은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한 채 다시 러시아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렇다면 레닌이 일생을 두고 꿈꾼 사회주의 이상 사회는 실현됐는가? 혁명 초반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1928년부터 레닌의 후계자로 올라선 스탈린의 강압적 주도로 소련은 급격한 공업화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수천만 자국민의 무고한 희생을 밑거름 삼아 추구한 ‘만민이 평등한 지상낙원 건설’이라는 외침이 한낱 미몽(迷夢)으로 드러나는 데는 70여 년으로 충분했다. 그래서 역사의 여신 클리오는 아이러니로 가득 찬 신비의 존재인가 보다. 자료=필자 제공


<이내주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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