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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이야기] 연평해전 주역…北 경비정 침범 수차례 막아

윤병노

입력 2019. 05. 10   16:32
업데이트 2019. 05. 12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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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국내 건조 고속정 ‘결정판’ PKM


‘명품’ 함정으로 연평·대청해전서 혁혁한 전과
 ‘율곡계획’ 일환 ‘함정 국산화’ 급물살 개발    


해상기동훈련에 투입된 해군2함대 참수리급 중형고속정들이 파도를 가르며 항진하고 있다.
해상기동훈련에 투입된 해군2함대 참수리급 중형고속정들이 파도를 가르며 항진하고 있다.

  
1971년 3월 27일 주한 미 7사단이 철수했다. 북한의 위협이 증가하던 가운데 주한미군 감축이 현실화되면서 ‘자주국방’이 절실해졌다. 이에 우리 군은 한미 협의하에 ‘국군 현대화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1972년 12월 29일에는 국방목표를 제정하며 ‘방위산업을 육성하여 자주국방체제를 확립’한다는 내용을 포함했으며, 1973년 3월 5일에는 방위산업 육성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율곡계획’도 이 시기에 수립됐다. 정부는 1974년 2월 25일 8개년 기간의 제1차 전력증강계획인 가칭 율곡계획을 확정했다. 방위산업을 육성해 자체 생산기반을 구축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참수리급’으로 분류되는 중형고속정(PKM: Patrol Killer Medium)’ 건조 계획은 이러한 토대 위에 설계됐다.


중량·무장 강화한 중형고속정 구축 추진

1970년대 들어 전후방에서 북한의 침투 시도가 증가했다. 우리 해군은 전방 전투전대의 임무수행 능력을 보강하면서 후방으로 침투하는 간첩선에 대처할 수 있는, 기존의 소형고속정보다 강한 무장을 보유한 전력의 필요성이 강조됐다.

초기에는 유도탄고속정(PKMM: Guided Missile Medium Patrol Killer) 후속 함정으로 엑조세(Exocet) 함대함 유도탄을 탑재하는 고속정 사업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 사업은 자국이 지원한 함정에 프랑스제 엑조세 유도탄을 설치하는 것을 반대한 미국의 의견에 따라 무산됐다.


이에 해군은 함대함 유도탄 대신 30㎜ 함포 2문을 장착하는 것으로 설계를 변경했다. 스틱스(Styx) 함대함 미사일을 장착한 북한의 코마급(Komar)과 오사급(Osa) 유도탄정의 도발은 우리 해군 최초의 유도탄고속정인 키스트 보트(KIST Boat)와 백구급 유도탄고속함(PGM: Patrol Ship Guided Missile Medium)으로 대응하기로 하고, 최고시속이 76㎞(41노트)에 육박하는 제비급 고속정(PK: Patrol Killer)을 기반으로 속력은 유지하되, 중량과 무장을 강화한 중형고속정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율곡계획과 함께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기간 내 추진된 중화학공업정책은 해군 함정을 국내에서 건조하는 데 활기를 불어넣었다. 국산 고속정 건조사업이 율곡계획 수립 이전에 시작돼 어느 정도 기반이 잡혀 있던 상황이었고, 여기에 1973년 수립된 ‘장기조선공업진흥계획’으로 국내 조선소 규모가 대폭 확장됐기 때문이다.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가 대형화되고, 현대중공업·대우중공업(현 대우조선해양)·코리아타코마(KTMI)가 이때 태동했다. 훗날 대형 전투함을 건조할 수 있는 기반은 이렇게 든든하게 다져졌다.


1976년 11월 첫 계약…105척 건조·인수


중형고속정 건조를 위한 첫 계약은 1976년 11월 이뤄졌다. 해군은 대한조선공사와 계약을 체결한 뒤 시제(試製·시험 삼아 만듦) 성격의 초도함 3척을 건조했다. 중형고속정 212·213·215정이다. 해군은 고속정에 조류 명을 사용한다는 원칙에 따라 ‘기러기’급을 부여했다. 이후 기러기는 강한 이미지를 주지 못한다는 의견에 따라 ‘참수리’급으로 명칭을 바꿨다.

초도함 건조 이후 해군은 시험성능평가를 거쳐 일부를 개선하는 등 4차 사업까지 34척을 추가 건조했다. 216정부터 267정까지다. 1982년 5차 사업부터는 전장을 33.1m에서 37m로, 배수량을 141톤에서 157톤으로 늘렸다. 함미의 20㎜ 재래식 수동포는 국내에서 개발한 20㎜ 발칸(Vulcan)포로 교체했다.

1988년 10차 사업부터는 함수포를 40㎜ 자동포로 교체하고, 사격통제장비를 장착했다. 해군은 1978년 초도함부터 1991년 13차 사업까지 모두 105척의 중형고속정을 인수했다.

1970년대 초부터 함정 국산화에 적극 협력해온 해군과 국내 조선소들은 이렇게 백구급 유도탄고속함을 통해 선진 조선기술을 익혔으며, 유도탄고속정·학생호·제비급 고속정을 건조하면서 조함(造艦·군함을 설계해 만듦) 기술이 수직으로 상승했다. 이러한 조함 기술이 쌓여 국내 건조 고속정의 ‘결정판’으로 불리는 참수리급 중형고속정이 탄생했고, 당시 최고의 ‘명품(名品)’ 함정으로 손꼽혔다.


1979년 작전배치 후 北 수상침투 대폭 감소


해군은 1978년 중형고속정을 인수한 뒤 이듬해 작전 배치했다. 한반도 전후방 해역에 투입된 중형고속정은 북한 간첩선의 수상 침투를 대폭 감소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실제로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북한의 수상 침투가 거의 중단됐다.

북한은 수중 침투 전술로 노선을 변경했다. 모선(母船)에 반잠수정을 탑재하거나 일본 상선으로 위장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중형고속정은 그만큼 북한에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중형고속정은 북한 경비정의 북방한계선(NLL: Northern Limit Line) 침범을 수차례 막아냈다. 특히 1999년 6월 15일과 2002년 6월 29일 발발한 제1·2 연평해전, 2009년 11월 10일 벌어진 대청해전에 참전해 혁혁한 전과를 거뒀다.

제1 연평해전에서 대패한 북한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 제2 연평해전을 일으켰다. 북한 경비정의 선제 기습포격에 우리 해군의 참수리급 고속정이 큰 타격을 입었다. 우리 장병들은 굴하지 않고 즉각 응사해 북한 경비정을 격퇴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해전으로 윤영하 소령, 한상국 상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이상 추서 계급) 등 6명이 전사했다.

우리 해군은 제2 연평해전 이후 중형고속정의 방탄 능력을 보강했으며, 7.62㎜ M60 기관총을 12.7㎜ K6 중기관총으로 교체했다.

글=윤병노 기자/사진=해군본부 제공


윤병노 기자 < trylover@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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