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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월 19일 해군 당포함, 북한 기습공격에 침몰

입력 2019. 01. 14   17:42
업데이트 2023. 01. 17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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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하는 당포함.
침몰하는 당포함.

 

1967년 1월 19일 동해 접적 해역에서 어로보호작전을 펼치던 해군 당포함이 북한의 해안포 기습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당포함은 이날 북한 해안포의 공격에 맞서 함포 170여 발을 응사하며 대응했지만 끝내 침몰했고, 39명의 장병도 전사했다.

 

강원 고성군 거진읍의 당포함 전몰장병 충혼탑 후면에 새겨진 전몰 장병 명단.
강원 고성군 거진읍의 당포함 전몰장병 충혼탑 후면에 새겨진 전몰 장병 명단.

 

해군역사기록관리단에서는 당포함 전사자 39명의 숭고한 군인정신을 기리기 위해 당포함 피격사건 50주년이 된 2017년『당포함 영웅들』(사진)을 발간했다.

 

이 책에서는 해군이 당포함을 인수한 1961년부터 북한 해안포와 교전 상황까지 당포함의 주요 작전·훈련·업적 등을 수록했다. 특히 참전용사의 증언을 기반으로 전우를 살리려 했던 당포함 승조원들의 투혼을 생생하게 담았다. 

 

■ 관련 기사 

   국방일보 기획 ‘이야기로 풀어쓴 북한사’ 중 ‘28회 당포함 사건’ 

    2015년 1월 12일자

   이신재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북한학박사  

 

당포함 사건은 1967년 1월 19일 동해 북방한계선 부근에서 어로(漁撈) 보호작전 중이던 한국해군 동해경비분대 소속의 당포함(PCE-56, 650톤급)이 북한 해안포의 기습공격으로 침몰한 사건이다.

 

어로보호작전은 북방한계선 부근에서 조업하는 우리 어선들을 북한 함정의 나포 위협으로부터 지키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어획량 증대와도 관련돼 있어 국가경제 측면에서도 중요한 임무였다.

 

그러나 당시 어선들은 북방한계선 근처로 갈수록 어획량을 늘릴 수 있었기 때문에 조업활동 중 간혹 북방한계선을 넘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북한경비정은 이런 어선을 강제로 나포하려 했다.

 

사건 당일에도 당포함은 70여 척의 명태잡이 어선을 보호하는 중이었다. 이날도 일부 어선이 북방한계선 근처까지 올라가 조업하고 있었고, 북한 경비정 2척이 우리 어선을 지켜보다 나포를 시도했다. 이에 대응하던 당포함은 우리 어선들을 남하시키는 과정에서 북한 해안포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게 됐다. 20여 분간 280여 발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당포함은 170여 발의 함포를 쏘며 응전했지만 결국 침몰 하고 말았다. 이 교전으로 79명의 승조원 중 39명이 전사하고, 3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북한의 계획된 기습 도발

 

사건 이후 북한은 당포함이 자신들의 ‘연해(영해)’를 침범했고, 자신들의 행위는 이에 대한 ‘정당하고 자위적인 조치’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포함 사건은 북한의 계획된 기습 도발이었다. 북한 경비정 2척이 우리 어선을 나포하려 한 것은 당포함을 유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포함이 북방한계선을 넘자마자 아무런 경고 없이 이미 준비해 놓았던 해안포 공격을 가한 것이다. 그것도 불과 20분 만에 280여 발을 발사했다. 결국 이 사건은 당포함을 유인해 공격하려 한 북한의 술책이었던 것이다.

 

북한은 당포함 침몰 나흘 뒤인 1월 23일자 노동신문에서 사건 당시 ‘미 태평양지구 육군사령관과 유엔군사령관이 함께 동해안을 시찰 중이었고, 당포함의 침몰 모습을 직접 보았다’고 주장했다.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지만, 이것이 맞는다면 북한은 도발 날짜와 시간까지 고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은 자신들의 입장을 선전하기 위해 1월 21일 외무성이 주관하는 내·외신 기자회견도 개최했다. 군사 문제를 외무성이 주관해 기자회견을 하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당포함을 공격했을까? 

 

그것은 당시 동·서해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던 해상충돌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당포함 사건이 있기 6개월 전인 1966년 7월29일에도 동해에서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이때는 북한 무장선박 9척이 어선으로 가장해 북방한계선 남쪽으로 침범한 후 해군초계정 PCS-202를 나포하려 했었다. 그러나 양측의 교전 결과 오히려 북한 선박 1척이 침몰했다.

 

이 사건 이후 북한은 우리 해군함정과 어선에 대해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 1966년 11월 22일에는 동해상에서 초계 중이던 우리 해군함정을 향해 해안포 40발을 발사했고, 11월29일에는 우리측 어선2척에 기관총 사격을 가하고 어선과 어부 8명을 납치해갔다.

 

이같은 일련의 해상 충돌 과정에서 북한의 ‘보복공격’으로 당포함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또 다른 도발의 시작 

 

북한은 당포함을 경호 임무를 하는 군함이라며 ‘경호함56호’로 불렀다. 그리고 당포함을 한국해군 함정이 아니라 미국 군함이라고 우겨댔다.

 

이런 북한의 억지 주장은 ‘일관’됐다. 1월 21일 개최된 제293차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에서도 그랬고, 1월 20일부터 1월28일까지 노동신문에 사건을 보도하면서도 그랬다. 1987년에 발행된 북한의 공식 문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서도 당포함을 한국해군 군함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외무성 기자회견을 통해 모든 책임을 미국에 돌렸다. 미국이 1966년 10월 존슨대통령의 방한 이후 ‘전쟁 도발 책동을 노골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고는 이번 당포함 사건은 자신들의 ‘4대 군사노선의 정당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이었다.

 

북한의 미국에 대한 경고는 정확히 1년 뒤인 1968년 1월 23일, 원산 앞바다에서 미 해군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함을 나포하며, 또 하나의 비극적인 사건으로 나타났다. 이 점에서 당포함 사건은 1960년대 후반 북한의 호전적 도발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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