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미 육군 개혁이야기

“다 내 탓이오”… 사실 ‘베트남전 참전’ 제동 걸었다

이영선

입력 2018. 12. 17   16:27
업데이트 2018. 12. 17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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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우리는 ‘맥나마라’의 개혁을 잘못 알고 있다 ㉻ :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린 맥나마라


한발 물러난 관망 의견 제시, 케네디·존슨 대통령 강력한 의지로 밀어붙여
‘베트남전 불리’ 건의했지만 묵살 당해… 오히려 결과 책임 지고 비판 수용

왼쪽부터 딘 러스크(국무장관), 존슨, 맥나마라. 1968년 2월, 공산 베트남군의 총공세로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다.  필자 제공
왼쪽부터 딘 러스크(국무장관), 존슨, 맥나마라. 1968년 2월, 공산 베트남군의 총공세로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다. 필자 제공

2009년 7월 6일, 맥나마라가 사망했을 때 뉴욕타임스가 뽑아낸 부고 제목은 ‘헛된 전쟁의 설계자 로버트 맥나마라, 93세를 일기로 죽다’였다. ‘헛된 전쟁’이란 다름 아닌 베트남 전쟁을 일컫는 것이었다. 맥나마라 자신도 1995년에 발간한 회고록에서 참전 결정이 “잘못된, 대단히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고백했다. 맥나마라는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비판을 모두 수용했다. 맥나마라에 대한 가장 권위 있고 신랄한 비판은 자신으로부터 나왔다. 그는 베트남전에서 맥나마라 팀이 얻은 교훈을 11개로 정리해 다음과 같이 제시하기도 했다.
하나, 적의 의도를 오판했고 미국에 닥친 위험을 과장했다.

둘, 남베트남을 우리의 경험과 관점으로 평가했다.

셋, 애국심·신념·가치관의 힘을 과소평가했다.

넷, 베트남의 역사·문화·정치·민족성 같은 것을 모른 채 전쟁을 치렀다.

다섯, 현대 첨단 무기·장비로 무장한 군대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민군 작전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여섯, 군대의 개입 전후에 의회·국민과 충분한 의사소통을 하지 않았다.

일곱, 작전 실시 후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발생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고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밝히지 않았다.

여덟, 지도자와 국민 모두 자신의 무지함을 몰랐다. 타국의 이익과 관점을 무시했고 각국이 고유의 정체성과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아홉, 국제 사회의 지원하에 다국적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는 군사 작전의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

열, 국제 문제는 삶의 문제들처럼 종종 즉각 해결 가능한 수단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세상은 어수선하고 인생은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았어야 한다.

열하나, 이상과 같은 실수들이 얽혀 매우 복잡하고 광범위한 정치·군사 문제를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방해했다. 그 결과가 베트남 전쟁이었다.



맥나마라는 베트남전 참전과 관련해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 그러나 베트남전 참전과 확전은 두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케네디는 대통령이 되기 전인 1956년 상원의원 시절부터 “베트남은 동남아시아 자유세계의 초석”이라면서 이곳을 포기하면 다른 곳도 차례로 공산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재임 기간인 1963년에 이미 군사고문단을 포함한 병력 1만6000명이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 후 1963년 대통령직을 인수하고 이어 재선에 성공한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은 부대통령 시절부터 참전 지지파였다. 그는 공세적인 군사 개입으로 베트남전을 조기 종식시키고자 했다.

사실 맥나마라는 참전 결정에 조심스레 제동을 거는 입장이었다. 1964년 3월 2일 맥나마라는 존슨에게 “지금 우리는 베트남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전보로 오는 소식은 베트남 정부군과 우리 군의 사기가 떨어져 있으며 대규모 쿠데타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 정도인데 이마저 혼란스럽습니다”라고 보고했다. 한발 물러나 관망하자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존슨은 “그러니까 훨씬 공세적인 조치를 빨리 취해야죠. 안 그래요? 왜 베트남 정부군을 더 지원 안 합니까? 사기가 떨어졌으면 봉급을 올려주지 뭘 기다립니까?”라며 맥나마라를 밀어붙였다.

또한 알려진 것과 달리 맥나마라는 베트남전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그는 1965년 7월 1일, 존슨에게 보낸 비밀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지금 이기고 있는 것은 공산 베트남입니다. 공산 게릴라가 많아져 전력 비율이 우리에게 불리합니다. 우리가 취할 방책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축차적으로 병력을 철수해 우리의 손해를 줄여야 합니다. 둘째, 미군 병력 수준은 7만5000명으로 유지해야 합니다. 물론 상황은 점점 나빠질 것입니다. 셋째, 실체가 있는 군사적 압박을 확장하면서 동시에 치열한 정치적 노력을 통해 협상이 시작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략)”

그러나 존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8시41분 맥나마라에게 전화를 걸어 ‘제안에 실망했다’면서 ‘우리가 모든 군사력을 동원하면 확실히 이길 수 있는지, 공산 베트남이 과연 끝까지 결사 항전할 것인지, 국회 동의가 필요 없는 충분하고 압도적인 군사 지원책이 없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이에 맥나마라는 ‘군사력을 더 투입하려면 동원령을 내려야 하고 그것은 의회의 동의 없이 불가능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힘으로는 우리가 이길 수 없다는 겁니다’라고 솔직히 대답했다. 그러자 존슨은 ‘그럼 동원을 하면 되겠군요’라고 대답했다. 아마 이 시점에서 맥나마라는 미국이 군사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패배할 것을 직감하지 않았을까?

위 내용은 비밀이 해제된 미 대통령기록관, 미 국무부의 사료, 녹취록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맥나마라는 이와 같은 일을 발설하지 않았다. 베트남전 참전, 확전의 책임을 다른 누구에게도 돌리지 않았다. 반대로 철저한 자기반성에서 나온 교훈을 전하려 했다. 미국 안보와 국방에 거름이 되길 바랐다.

<남보람 소령/군사편찬연구소>

이영선 기자 < lgiant61@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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