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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최초로 수립한 자주적 전력증강계획

입력 2018. 12. 12   17:22
업데이트 2018. 12. 12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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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국군 전력증강사업인 ‘율곡(栗谷)계획’과 그 설계자들


1960년대 말 북한 도발 급증
미국선 주한미군 철수 문제 대두
자주적 군사력 건설 시급한 과제로 

 
1973년 합참 전략기획국 신설
이병형 육군중장 중심으로 연구 착수
1974년 2월 25일 대통령 재가 받아
자주국방 국책사업 율곡계획 확정


1993년 당시 국방부에서 율곡사업 개선책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1993년 당시 국방부에서 율곡사업 개선책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1987년 7월 당시 율곡사업 공로자 표창식 장면
1987년 7월 당시 율곡사업 공로자 표창식 장면

‘율곡계획(栗谷計劃)’은 국군의 전력증강사업계획을 통칭(通稱)하는 용어다. 율곡계획은 우리 군의 자주적 군사력 건설을 위한 전력증강사업계획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강조했던 유비무환(有備無患) 정신에 기초를 두고 수립됐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율곡계획은 1970년대 불안정한 한반도 안보환경에서 우리나라가 살아남기 위해 우리 군이 강력히 추진했던 ‘국방상의 자위책(自衛策)’이라고 할 수 있다.
율곡계획은 박정희 대통령이 천명한 자주국방의 한 축이었다. 박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위해 국가동원체제(향토예비군·민방위대·학도호국단 창설)를 구축하고, 방위산업을 추진하고, 독자적인 한국형 전쟁대비계획(태극72계획)을 수립하고, 그리고 국군의 전력증강사업계획인 율곡계획을 추진했다.

율곡계획은 1973년 4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적 군사력 건설 지침에 따라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국방부는 ‘율곡계획’으로 알려진 1차 전력증강사업계획(1974∼1980)을 수립하고 1974년 2월 25일 대통령 재가를 받아 국군 최초의 자주적인 전력증강사업을 추진하게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주국방을 향한 전력증강사업이다.

율곡계획 수립에는 소수의 창조적 설계자들이 있었다. 1960년대 말 북한의 도발이 급증하고 1970년대 초 미국의 군원이관 및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대두되면서 자주적인 군사력 건설 문제가 시급한 과제로 제기됐다. 이런 상황에서 1972년 6월 3일 합동참모본부장에 취임한 이병형(李秉衡) 육군중장은 ‘자주적으로 군사력을 건설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연구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 이병형 장군은 합참에 ‘전략기획국’을 신설하고, 전문 인력을 보강해 독자적인 군사전략과 군사력 건설을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1973년에 설치된 합참 전략기획국은 전략증강사업계획인 율곡계획의 산실 역할을 했다. 당시 합참에는 자주국방에 역량을 보탤 쟁쟁한 인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합참의장은 참군인으로 널리 알려진 한신(韓信) 육군대장이었고, 합참본부장은 6·25전쟁 때 지략과 용맹으로 이름을 날린 이병형 중장(2군사령관 역임)이었다. 그리고 자주국방의 설계책임을 맡은 전략기획국장은 이재전(李在田, 육군중장 예편, 전쟁기념사업회 회장 역임) 육군소장이었고, 그 밑에서 핵심 브레인 역할을 하게 된 1과장 임동원(林東源, 육군소장 예편, 통일부 장관과 국가정보원장 역임) 대령과 뛰어난 영관급 장교들이 있었다. 영관급 장교 과원(課員)에는 육군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을 역임한 윤용남(尹龍男) 소령과 육군중장으로 예편 후 국가보훈처장을 지낸 이재달(李在達) 소령이 있었다.

이병형 합동참모본부장은 전략기획국 전담연구팀에게 국제정세, 남북한 군사정세, 국내 경제문제를 분석 종합한 보고서(‘지휘체계와 군사전략’)를 작성케 했다. 그리고 1973년 4월 19일 을지연습 때 유재흥(劉載興) 국방부 장관을 대신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를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가장 의욕적이고 고무적인 보고”라는 극찬과 함께 ‘자주적 군사력 건설’에 대한 지침을 내렸다. 첫째 자주국방을 위한 군사전략 수립과 군사력 건설 착수, 둘째 작전지휘권 인수 시에 대비한 장기 군사전략의 수립, 셋째 중화학공업발전에 따라 고성능 전투기와 유도탄 등을 제외한 주요 무기와 장비의 국산화, 넷째 장차 1980년대에는 이 땅에 미군이 한 사람도 없다는 가정하에 독자적인 군사전략 및 전략증강계획을 발전시킬 것을 지시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합동참모본부는 1973년 7월 합동기본군사전략과 군사력 증강에 관한 기본지침을 수립해 7월 12일 각 군에 ‘군 장비 현대화 계획’ 작성 지침을 하달했다. 그리고 11월 5일에는 ‘국방7개년계획 투자비사업계획 위원회’를 설치해 각 군에서 건의한 장비 현대화 계획을 조정·보완해 이를 합동참모회의에서 의결했다. 그때가 1974년 1월 16일이다. 이어 2월 6일에는 ‘국방7개년계획 전력증강 투자비 분야’를 보안상 ‘율곡계획’으로 건의해 합참의장의 승인을 받았다. 최초 ‘율곡계획’ 명칭은 3개 안, 즉 율곡(A안), 아사달(B안), 두꺼비(C안)였는데, 이병형 합참본부장과 한신 합참의장의 승인을 거친 후 1974년 2월 25일 ‘국방7개년계획 투자비 분야’ 보고 때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받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율곡계획’으로 확정됐다.

율곡계획은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입을 예견하고 ‘10만 양병론’을 주장했던 이이(李珥) 선생의 호인 율곡(栗谷)에서 따 온 것으로 유비무환 정신을 본받자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를 토대로 국방부는 1차 전력증강계획(1974∼1980)을 수립해 1974년 2월 25일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율곡계획은 우리나라 최초의 ‘자주적인 전력증강계획’으로 자리를 잡게 됐다.

율곡계획은 1970년대 우리나라가 국방상의 자위권 차원에서 독자적으로 추진한 자주국방을 위한 국책사업이었다. 이 계획의 기본 전략개념은 한미연합억제전략에 바탕을 둔 한미군사협력체제 유지, 주한미군 계속 주둔 보장, 현 휴전 상태의 최대 연장, 방위전력의 우선적 발전, 자주적인 억제전력의 점진적 형성이었다.

이를 위해 장기적으로 국방비 가용액을 국민총생산(GNP)의 4.5%(1974∼1980년 7년간 평균) 수준을 유지하고, 투자비는 15억2600만 달러로 책정했다. 또한 전력증강 투자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운영유지비를 최대한 절약하고, 방위산업을 육성하여 자체 생산기반을 구축해 나가되, 전력증강의 우선순위는 대공 및 대전차 억제 능력 강화, 해·공군력 증강, 예비군 무장화 순으로 정했다. 하지만 율곡계획은 진행 도중 당시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던 경제개발5개년계획(1977∼1981)과 일치시키기 위해 1981년에 끝마치도록 1년을 더 연장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은 우리나라 국방지형(國防地形)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국방에 있어서 한미동맹의 큰 틀을 유지하되, 종전의 절대적인 미국 의존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군사력을 건설하겠다는 것이 박 대통령이 구상한 자주국방의 개념이다. 자주국방의 핵심에는 자주적 군사력 건설을 위한 율곡사업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자주국방은 구호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국군통수권자의 국제정세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 있는 혜안(慧眼)과 국가 생존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정옥 전 군사편찬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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