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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협력자로 때론 라이벌로…독립 위해 함께 싸웠다

기사입력 2018. 12. 11   17:24 최종수정 2018. 12. 11   17:28

<44> 철기와 혁명동지들

은인이자 스승 김좌진 장군 


신흥무관학교 교관시절 만난
지청천 장군과는 평생 동지 


홍범도·김원봉과는
이념적 차이로 다른 길 걸어 


청산리전투 승리 소식 듣고
서신 보낸 이승만 대통령과 첫 인연
정치적 소용돌이에 여러 번 얽혀 


김구 선생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1940년 9월 17일 열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장면. 앞줄 가운데가 김구 주석이고, 김구 왼쪽이 총사령관인 지청천 장군이다.

철기의 일생에는 한국 독립과 광복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혁명동지가 등장한다. 만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 때는 홍범도·김좌진·지청천·김원봉 장군 등이 대표적이었다. 광복군 시절과 광복 후에는 김구 선생과 함께 이승만 박사가 등장한다. 때로는 협력을, 때로는 정치적 라이벌이자 이념적 대립 관계였으나 항일무장 투쟁 시 이들의 공동목표는 조국의 독립 쟁취였다. 광복 후에는 신생 국가의 기틀을 세우면서 공산주의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기 위한 국가방위의 설계와 구축이었다. 과정에서 차이는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항일무장투쟁기 혁명동지들 

 
김좌진 장군은 철기에게 은인이자 스승이었다. 서로군정서에서 좌절을 맛보고 있었던 철기를 북로군정서로 발탁한 것은 전적으로 김좌진이었다. 청산리전투에서는 전투의 전권을 철기에게 위임했다. 청산리전투 이후 대부분 독립군 지도자들이 공산 러시아행을 주장할 때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한 사람도 두 사람이었다.

연해주 지역에서의 공산 러시아에 의한 무장해제, 그리고 만주 지역에서 중국군에 의한 무장해제로 철기가 반(半)유랑 생활을 할 때였다. 신민부를 조직해 성동군관학교를 세우려던 김좌진은 철기에게 그 일을 맡기기도 했다. 특히 마리아와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주선한 것도 김좌진이었다.

이후 철기는 현상금 50만 냥이 걸린 채 장학량 군대에 쫓겨 대흥안령과 몽골고원 사이에서 은거하다 김좌진 장군의 암살 소식을 듣는다. 철기는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고 은거지에서 조문을 지어 예를 표했다.

철기와 지청천 장군은 평생 동지였다. 철기가 지청천 장군을 처음 만난 것은 신흥무관학교 교관 시절이다. 지청천 장군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와 있었다. 청산리전투 이후 만주와 러시아령 연해주의 접경지역인 밀산으로 이동할 때 서로군정서에 있던 지청천이 합류했다. 자유시로 이동 시 철기는 김좌진과 함께 남았고, 지청천은 홍범도와 함께 자유시로 이동했다가 고초를 겪었다.

광복군 창설 시 지청천은 사령관으로, 철기는 참모장과 제2지대장으로 같이 활동했다. 정부 수립 시에는 철기가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으로, 지청천은 무임소 장관으로 정부 수립에 기여했다.

홍범도와 김원봉은 이념적 차이로 인해 길을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다. 청산리전투를 같이 했던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 후 공산 소비에트 협동농장 건설에 참여함으로써 항일무장투쟁 대열에서 이탈했다. 김원봉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지만 철기가 교관으로 부임하기 직전 졸업했다. 비슷한 나이(김원봉이 두 살 많음)지만 활동 시기와 무대는 달랐다. 그가 조직한 의열단은 유명한 항일무장투쟁 단체였다. 사회주의 계열인 김원봉은 그가 이끌던 조선의용대와 함께 광복군에 합류함으로써 좌우합작의 대표적 사례를 만들어냈다. 김원봉은 광복군 1지대장, 이범석은 2지대장이었다. 하지만 광복 후 정부 수립 직전에 남한에서 북한으로 넘어갔고, 북한에서 고위직을 역임했다. 6·25전쟁 이후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 그의 모든 항일무장투쟁 업적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좌우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비운의 혁명가다.


철기와 이승만, 그리고 김구

철기와 이승만의 관계는 청산리전투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산리전투의 쾌거가 미주 지역으로 알려지자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있던 이승만은 개인 서신을 만주의 청년독립군 철기에게 보냈다.

“이 전투 덕분에 우리도 이제 독립투쟁을 하고 있음을 미국 조야에 떳떳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소.”

이것이 철기와 이승만의 첫 인연이었다.

광복 후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철기를 초대 내각의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으로 지명했다. 이후 철기는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여러 번 얽히게 된다. 때로는 이용당하고 때로는 핍박받는 일이 반복됐다. 그런데도 철기는 그가 환국 시 다짐했던 구존유금 지재보국(苟存猶今 志在報國·구차하지만 지금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언젠가 나라가 부를 때 이에 보답하기 위함이다)의 철학을 견지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즉시 철기를 불러 섭섭함은 잊어버리고 국난극복에 동참하기를 요청했다. 그리고 각계로부터 철기의 국방부 장관 재임명 요구에도 1950년 7월 전쟁 중에 오히려 대만대사로 출국시켰다. 철기는 한동안 국내로 들어오지 못했다.

1952년 5월 부산 피란정부 시절, 이승만은 철기를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한다. 철기는 한동안 고사하다가 마지못해 국가의 안정을 위해 내무부 장관직을 수락했다. 그러나 취임 후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난다. 당시 이기붕과 치안국장 문봉재가 일으킨 사건이었다. 하지만 내무부 장관인 철기가 그 오욕을 다 덮어썼다.

그런데도 망명했던 이승만 박사의 시신이 미국 하와이에서 여의도에 비행기로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영접한 사람은 철기였다. 영결식 때 운구차에 덮인 만장은 철기의 글이었고, 이승만 박사의 묘비명도 철기의 작품이다.

철기에게 백범 김구 선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철기가 운남군관학교를 마치고 상해로 돌아왔을 때였다. 그때 백범 선생은 임시정부 경무국장이었다. 40대의 백범 선생은 철기보다 20여 년 위여서 부정을 느끼게 했다. 첫인상은 강인하면서도 험한 인상이었지만, 접근할수록 비범한 분이었다고 철기는 회고했다.

중국군에 몸담고 있을 때도 철기는 임정과 비밀리에 항상 연락을 취했다. 중일전쟁을 확대해 피의 대가로 조국 광복을 쟁취하자는 철기와 김구 선생의 생각은 같았다. 김구는 광복군 활동을 사실상 철기에게 전적으로 맡기다시피 했다.

철기와 김구는 1945년 8월 9일, 광복군의 조국 정진작전을 앞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는 함께 감격과 낙망을 같이하기도 했다.

광복 정국은 이승만 박사 측과 김구 선생 측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 문제로 첨예하게 갈등을 겪고 있던 시기였다. 독립운동 진영은 두 갈래로 나뉘었고, 두 사람의 측근이 벌인 과잉충성의 소용돌이가 정국을 휩쓸었다.

백범 선생이 비명에 가신 날, 당시 국무총리였던 철기는 화력발전소 관계로 목포에 가 있다가 서거 급보에 즉시 상경해 달려갔다. 철기는 깊은 슬픔 속에서도 최대한 예우로 김구 선생의 장례식을 국민장으로 치르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철기는 생전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을 비교한 적이 있다. 이 박사는 이상에 중점을 둔 분이고, 백범 선생은 행동에 중점을 둔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이 박사는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백절불굴의 용기가 있었고, 백범 선생은 신의와 인격을 내세워 행동을 관철하는 저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또 이승만은 서양적인 사고방식으로 타협을 선택했으나, 김구는 대의명분을 지키며 자주독립에서 양보가 없었다. 초대 대통령 자리는 이 차이에서 결정됐다.

결국 이 박사는 초대 대통령이 되어 반 조각이나마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현실의 정치가가 됐다. 반면 김구 선생은 끝까지 대의명분을 주장하면서 민족통일을 관철하고자 한 신념의 정치가로 역사에 남았다.  <박남수 철기 이범석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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