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발길 따라 3000리 안보대장정

계백 장군부터 유관순 열사까지… 영웅들의 역사가 숨쉬는 곳

입력 2018. 11. 28   17:57
업데이트 2018. 11. 28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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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충청


일제강점기, 해외로 동원된 동포들 안치한 국립묘지 ‘망향의 동산’


망향(望鄕). 이역만리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실향민의 마음을 담은 단어다. 지난 19일 취재차 고속도로를 달리다 숨을 돌리기 위해 찾은 곳이 바로 망향휴게소였다.

별반 다를 것 없는 평범한 휴게소 한쪽, 덤덤하게 적혀 있는 표지판을 우연히 발견했다. ‘망향휴게소는 일제강점기 해외로 강제 동원·이주됐다가 숨진 동포들을 안치하기 위해 조성된 국립묘지 망향의 동산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도로 너머로 자그마한 탑이 보였다. 예정을 바꿔 찾아간 망향의 동산은 한적한 산 밑에 자리 잡은 작은 공동묘소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기념탑 양옆으로 빼곡히 들어선 묘비에는 망국의 설움을 간직한 주인의 눈물이 담겨 있는 듯했다. 관리인에 따르면 현재 이곳에는 일본과 중국은 물론 대만, 홍콩,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미국, 캐나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말라위, 프랑스 등 세계 각지에서 고향을 그리다 숨진 해외동포들이 안식을 취하고 있다. 세상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고국 땅에 묻힐 수 있었던 이들의 영혼은 이제 편안할까? 무거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계백장군전승지 동상. 사진=한재호 기자
계백장군전승지 동상. 사진=한재호 기자

  
 

논산시 ‘계백장군 유적 전승지’… 1300여 년 전 처절한 전투의 흔적


본격적인 첫 취재지는 논산시 부적면. 1300여 년 전 5000명의 결사대가 ‘일당십(一當十)’의 결전을 벌였던 황산벌이 있는 곳이다.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달리니 ‘계백 장군 유적 전승지’가 보였다.

660년 7월 계백 장군은 황산벌에 진지를 만들고 10배가 넘는 신라군에 맞서 처절한 전투를 펼쳤다. 네 번이나 이겼음에도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계백 장군과 결사대는 끝내 마지막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했다.

이곳에는 패장인 계백 장군의 시신이 묻힌 것으로 알려진 묘소와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황산벌의 패배로 나라를 잃은 백제 유민들이 전사한 계백 장군의 시신을 이곳에 가매장했다고 한다. 한동안 이 지역이 ‘가장(假葬)골’이라고 불린 이유다.

문이 잠긴 사당을 지나 작은 언덕을 오르니 계백 장군의 묘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둘레 47m, 높이 6.5m나 되는 묘소의 거대한 규모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계백 장군은 가매장됐다고 하는데 이렇게 큰 묘소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시신을 은밀히 매장한 뒤 지역주민과 흘러들어온 백제 유민들이 계백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작은 묘제를 올렸다고 한다. 1000년이 훌쩍 지난 1680년 비로소 위패를 모신 충곡서원이 세워지고 제대로 된 제사가 가능했다. 그리고 1976년 부적면민들이 중심이 돼 묘소를 새로 만들었고 논산시 등의 지원으로 지금의 모습이 됐다.

역사는 패자를 기억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계백 장군과 결사대는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들이 보여준 감투와 호국정신 때문이리라. 유적지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6m 높이의 계백 장군 동상은 매일 자신이 싸운 황산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라는 망해 흔적없이 사라졌지만 영웅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충무공 기리는 아산시 현충사·장군 묘소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사진=한재호 기자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사진=한재호 기자


충남 아산시는 ‘충무공의 도시’다. 물론 그의 이름을 딴 도시, 그가 활약했던 지역도 따로 있지만 이곳이 바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심신을 갈고닦은 곳이며 또 그가 잠든 곳이 때문이다.

아산시에는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널리 알리고 이를 되새기기 위해 지어진 현충사와 이순신 장군 묘소가 있다. 현충사는 1706년 아산 유생들이 조정의 허락을 받아 세운 사당이다. 이듬해에는 숙종이 직접 현충사라는 현판도 내렸다.

위기도 있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현충사는 문을 닫았다. 이후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하던 현충사는 일제강점기에는 종가의 형편이 어려워져 충무공 묘소와 위토(제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보유하던 토지)가 은행 경매로 넘어갈 지경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충무공의 호국정신을 잊지 않았다. 이런 소식이 신문을 통해 전해지자 전국 각지에서 충무공을 지키기 위한 기금이 빗발쳤고 다행히 묘소를 지킬 수 있었다. 현충사를 나와 오솔길을 걷다 보면 약관의 충무공이 혼인한 뒤 32세에 무과에 급제할 때까지 살았던 집이 보인다. 집 옆에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활터도 있다. 아직 영웅이 아니었던, 평범한 무과 준비생이었던 ‘인간 이순신’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현충사 입구에 있는 충무공이순신기념관에서는 전쟁 당시 그가 사용했던 칼과 옥로(머리 장신구) 등 다양한 유품을 보며 영웅의 향기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병천면 용두리, 유관순 열사 생가·기념관  


유관순 열사 기념관. 사진=한재호 기자
유관순 열사 기념관. 사진=한재호 기자


세계에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알린 3·1만세운동 한 달 뒤인 1919년 4월 1일. 충남 천안시 병천면의 한적한 장터에 3000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이들을 향해 일제는 무자비하게 총구를 겨눴다. 호서지방 최대의 만세운동으로 기록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은 19명이 숨지고 30여 명이 중상을 입는 초유의 유혈사태로 마무리됐다. 이날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선 열사를 잃은 ‘소녀’ 유관순은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돼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유관순 열사는 옥중에서도 모진 고문을 견뎌내며 끝까지 항거했다. 하지만 끝내 1920년 9월 28일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꽃다운 나이에 숨을 거뒀다.

유관순 열사가 태어나 자랐던 병천면 용두리에는 유관순 열사의 희생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과 추모각, 생가 등이 있다. 기념관에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유관순 열사 가족의 가계도와 유관순 열사의 수형자기록표, 재판기록문 등 다양한 전시물이 있다. 기념관을 지나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유관순 열사의 영정을 모신 추모각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순국자들의 위패를 모신 추모각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기자 나이의 반밖에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유관순 열사의 영정을 바라보니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분향을 마치고 돌아서니 추모각 앞으로 열사가 독립의 꿈을 불태웠던 아우내 장터가 한눈에 들어왔다. 기념관과 생가를 둘러본 뒤 요기를 하기 위해 들른 아우내 장터에서 다시 한 번 추모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충북 음성군 감우재 전투 현장… 6·25전쟁서 우리 군이 거둔 첫 승리   


감우재전승기념관. 사진=한재호 기자
감우재전승기념관. 사진=한재호 기자



이 지역이라고 늘 고난과 역경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경로를 북쪽으로 돌려 충북 음성군으로 향하면 6·25전쟁에서 우리 국군이 거둔 첫 승리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나온다. 이른바 ‘감우재 전투’라고 불리는 음성지구 전투 현장이 그곳이다.

음성지구 전투는 음성군 무극리, 감우재, 부용산, 동락리 일대 전투의 총칭이다. 전쟁 직후 하염없이 밀리던 전선을 잠시 고착시키고 ‘우리 군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결정적인 전투가 바로 음성지구 전투다.

국군6사단 7연대와 1사단 11연대는 1950년 7월 4일부터 7월 10일까지 장호원에서 음성 방향으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 15사단을 상대로 지연전을 벌였다. 이들의 목표는 우리 군이 낙동강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도록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것. 부대는 적의 진격을 저지한 것은 물론 일부 부대를 포위섬멸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 전투로 북한군 2700여 명이 사망하고 170여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수많은 장비 손실을 입었다.

음성IC에서 얼마 걸리지 않는 곳에 있는 ‘무극전적국민관광지’에는 우리 군의 첫 승리를 기록한 ‘감우재전승기념관’이 있다. 작은 건물 안에는 전투 당시의 유품과 기록 영상 등을 볼 수 있는 전시실이 마련돼 있다.

드디어 충청도에서 승리의 흔적을 찾았지만 이곳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현지 주민들의 말은 마음 한구석을 아리게 했다. 기념관 앞 작은 구멍가게에서 만난 마을 어르신은 “무슨 날이나 돼야 ‘높으신 분’들 몇몇이 찾아오지 보통은 차들이 방향을 바꾸는 ‘회차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며 혀를 찼다. ‘전쟁 세대’인 그는 “사람들이 점점 6·25전쟁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다”며 “이제 감우재 전투를 기억하는 사람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했다.

글=맹수열/사진=한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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