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정호영의 역사소설 광해와 이순신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광해군

정호영

입력 2018. 11. 23   10:56
업데이트 2018. 11. 23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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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개혁군주 광해의 부침 (215회)



광해군의 정치 소신은 분명했다. 냉철한 판단으로 나라를 살리는 것이 어떤 명분보다 더 중요했다. 명나라가 추가 파병을 요구하며 압박하자 단호히 거부했다. 이 일로 광해군은 자신의 지지세력마저 대거 등을 돌렸지만, 결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광해군은 대신들과 치열하게 언쟁하고 때론 설득하면서 자신의 정치 의지를 확고히 피력했다.

“명에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는 지킬 것이오. 그러나 조선의 존망 여부까지 걸어야 할 요구는 거부하오. 후금이 오랑캐임은 분명하지만, 그들을 다독거려 침략을 막는 것이 중요하오. 그렇게 해서 얻어진 평화의 시간 동안 군사대비태세를 충분히 갖출 때 비로소 전쟁도 할 수 있는 법이오. 지금은 힘을 길러야 할 시기요.”

1623년 3월, 광해군은 반정(反正)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안팎의 시련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탓이었다. 반란을 주도한 세력은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였으며, 명나라의 은혜를 배반한 죄’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광해군은 땅을 쳤다. 조정을 주도하는 대북의 이이첨 등을 견제하고자 탕평책 차원에서 등용한 서인들에게 허를 찔린 것이었다. 반란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역모의 움직임을 알고 반란을 제압해야 한다는 보고가 올라왔지만, 광해군은 이를 묵살했다. 하도 거짓 누명을 씌워 정적들을 제거한 이이첨 등의 상소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대북이 반란을 구실로 정적을 제거하려는 음모라고 오판했다.

어이없이 임금 자리를 빼앗겼지만, 광해군의 마음 한편으론 새로 집권한 인조가 정치를 잘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나 인조는 자신의 권력유지에만 급급할 뿐 나라를 살리는 일에는 최악이었다.

1627년 1월, 후금은 조선을 침략했다. 오랑캐라고 얕잡아 보며 대비태세를 게을리한 조선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임금인 인조는 한양을 버리고 강화도로 피신했다. 그러다가 결국 후금과 굴욕적인 형제의 맹약을 맺으며 고개를 숙였다.

후금에 호되게 당했지만,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현실을 냉정히 보는 안목이 없었다. 오히려 지극정성으로 명나라를 섬겼고, 그것이 결정타가 됐다.

1636년 12월, 후금에서 청나라로 국호를 개칭한 청의 2대 황제 홍타이지는 직접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버티다가 끝내 온갖 수모 속에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

패배의 결과는 참혹했다. 조선은 자주국의 지위를 잃고 청나라의 속국 신세가 됐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와 차남 봉림대군을 비롯해 수많은 신료가 포로로 잡혀갔다. 또한, 무수히 많은 백성이 죽고 끌려갔다. 이후 조선은 해마다 엄청난 조공을 바치며 나라의 명맥만 유지하는 껍데기로 전락했다.

정호영 기자 < fighter7@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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