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정호영의 역사소설 광해와 이순신

후금과 갈등 피하려 외로운 싸움

정호영

입력 2018. 11. 22   15:04
업데이트 2018. 11. 22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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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개혁군주 광해의 부침 (214회)



선조는 명나라에 의존하며 기꺼이 속국의 신하임을 자처했다. 그런 선조가 남긴 폐해는 광해군의 입지를 더욱 좁게 했다. 이미 명나라를 능가하는 군사력을 지닌 후금과 전란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조선이 전쟁을 벌이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더욱이 누르하치가 조선과는 평화롭게 지내자고 친서를 보낸 마당에 선뜻 나설 수도 없었다.

광해군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1년 가까이 명의 요구를 거부했다. 한편으로는 명을 설득하려고 애를 썼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금을 달랬다. 하지만 광해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신하들이 오히려 한목소리로 아우성을 쳤다. 특히 임금인 광해군을 팔아 제멋대로 정적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던 이이첨까지 노골적으로 명나라의 요구를 지지했다. 광해군은 더 참지 못하고 신하들을 비판했다.

“피폐한 이 나라의 현실을 좀 보시오. 도대체 준비도 안 된 나약한 군대를 보내서 뭘 어쩌자는 것이오? 농부를 호랑이 굴에 집어넣자는 것인데, 우리의 백성인 농부가 왜 멀리 남의 땅에 가서 호랑이 밥이 되어야 한단 말이오?”

광해군의 매서운 질책에도 신료들은 명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再造之恩)며 맞섰다. 명나라 조정에서도 파병 요구에 선뜻 응하지 않은 조선에 대해 불만의 목소리를 높였다. 광해군은 안팎으로 협공을 당하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1619년 2월,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전투원·비전투원 합쳐 1만 병력을 지휘하는 전권을 부여하고 중국으로 보냈다. 광해군은 무관이 아니라 중국어에 능한 어전통사(임금 직속의 통역관) 출신인 강홍립에게 밀지를 내렸다. 적당히 싸우는 체하다가 상황을 봐서 살아남는 방법을 찾으라는 지시였다.

후금의 중심지로 진격하던 10만이 넘는 명군 대부분은 살이호(薩爾滸) 전투에서 누르하치의 군대에 각개 격파됐다. 명군 각 부대가 거의 전멸하자 뒤를 따르던 조선 군대는 후금과의 싸움을 돌연 중단했다. 조선군은 후금 기마대의 기습을 받아 피해가 속출하는 가운데서도 접전을 벌였다. 그러다 후금이 화의를 맺자고 제안하자 순순히 응했다. 어차피 명군이 대패해 몰살당한 마당에 악착같이 싸울 이유가 없었다.

지휘관인 강홍립은 후금에 부득이한 상황에서 본의 아니게 싸우게 됐다고 설명했다. 후금은 이를 항복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포로가 된 수천 명의 조선군은 훗날 적지 않은 병력이 고향인 조선으로 되돌아왔다. 후금에 억류된 강홍립은 이때부터 여러 경로를 통해 내부 정보를 광해군에게 보냈다.

이에 대해 조정의 대소 신료들은 강홍립을 매국노라 비난했다. 또한, 강홍립의 가족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광해군을 압박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강홍립을 끝까지 감싸며 후금과의 관계를 도모했다. 임금 혼자서 조선과 후금의 갈등을 막다시피 했다.


정호영 기자 < fighter7@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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