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정호영의 역사소설 광해와 이순신

광해군, 탕평책과 대동법 실시

정호영

입력 2018. 11. 21   14:30
업데이트 2018. 11. 21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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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개혁군주 광해의 부침 (213회)


광해군은 먼저 인사에서 탕평책을 썼다. 당파를 떠나 훌륭한 인재를 발탁해 나라의 어려움을 헤쳐나가기 위해 최고 관직인 영의정에 유성룡의 후계자이자 남인인 이원익을 등용했다. 또한, 서인인 이항복과 당파가 없는 이덕형도 중용했다. 집권 초반기에는 이들 세 사람이 정승 자리를 주고받았다.

즉위 직후인 1608년 5월에는 경기도 지역에서 대동법을 전격적으로 실시했다. 공물을 각종 현물 대신 미곡으로 통일해 징수한 것이었다. 과세 기준도 종전의 가호에서 토지의 결(結) 수로 바꾸었다. 이에 따라 토지를 가진 농민들은 공납의 부담이 경감됐고, 무전 농민이나 영세 농민들은 이 부담에서 제외됐다. 대동법의 시행은 조세의 금납화로 상품 화폐경제의 발전을 유발함으로써 임진왜란 이후 파국에 이른 재정난을 타개할 수 있었다.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신음하던 백성들이 손쉽게 치료받을 수 있도록 의학서인 『동의보감』도 간행했다. 임금 선조가 죽자 대신들이 어의였던 허준에게 그 책임을 물어 처벌하려던 것을 광해군이 적극 보호해 무사히 집필을 마치게 했다. 이러한 갖가지 제도 개혁으로 흐트러진 민심과 나라의 기강은 차츰 제자리를 잡아갔다.

광해군은 재임 초기 수년간 국정을 무난하게 이끌었지만, 곧 안팎으로 시련을 맞게 됐다. 안으로는 정쟁이 그치지 않았고, 크고 작은 역모 사건이 벌어졌다. 광해군은 자신을 지지하는 측근 대신들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칼날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대북의 이이첨 등은 역모 누명을 씌워 광해군의 즉위를 도운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살해했다. 광해군은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였다는 멍에를 졸지에 모두 뒤집어썼다. 인목대비 폐위에 반대한 이원익·이항복·이덕형 등 재임 초기 공신들도 대북에 의해 줄줄이 쫓겨났다. 광해군은 정권의 일등공신인 대북의 전횡에 더욱 고립됐다.

나라 밖 상황도 만만치 않았다. 사실 국방은 광해군이 제일 역점을 둔 분야였다. 광해군은 유성룡이 남긴 『징비록』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임진왜란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고, 또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을 뼈저리게 아쉬워했다. 이 시기 조선을 위협할 수 있는 적은 남쪽의 왜군이 아니라 북쪽 오랑캐인 여진족이었다. 광해군은 이러한 정보를 여러 경로로 알아내고 대비책 마련에 고심했다.

당시 조선과 국경을 접한 만주에서는 일대 격변이 일어났다. 여진족의 한 부족장이었던 누르하치가 여진족 사회를 통일하더니 과거 금나라를 계승하겠다는 뜻으로 후금을 세웠다. 그런 뒤 곧 명나라를 위협했다. 이에 명나라는 누르하치를 응징하는 데 필요한 병력과 물자를 보내라고 조선에 요구했다.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 도왔으니 이번에 보답하라는 뜻이었다.


정호영 기자 < fighter7@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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