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테러리즘과 국가안보

극단적 순수 집착… 폭력·투쟁 등 과격주의로 변화

입력 2018. 02. 2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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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동 테러의 이념적 뿌리


20세기 이슬람 개혁과 각성운동은 이집트서 꽃 피워

현대 저항조직 팔레스타인 하마스,레바논 헤즈볼라 등장

과격파 사이드 쿠틉의 사상, ISIL 투쟁방식에 지대한 영향

 

 

라마단 기간 중 예배하는 무슬림들.



테러가 날 때마다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이슬람 원리주의는 서구와 이슬람 세계가 보는 관점이 서로 다르다. 서구언론에서 언급하는 이슬람 원리주의는 코란과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록(하디스)의 구절과 가르침을 광신적으로 따르면서 타락한 서구사회는 물론 변질된 이슬람 사회까지를 뒤엎거나 변화시키려는 급진적 사상운동을 일컫는다. 그러한 사상이 바로 알 카에다나 ISIL 같은 이슬람 테러조직들을 양산한 이념적 바탕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슬람 원리주의’라는 용어는 영국학자 와트가 그의 저서 ‘이슬람 원리주의와 근대화’라는 책에서 이슬람의 전통적인 세계관을 교조적으로 해석하고 실천하려는 과격한 이슬람 운동을 지칭하면서 일반화됐다.

 

 

와하비즘의 사상적 기초이론을 주창한 이븐 타이미야.

 


그러나 이슬람세계에서 이슬람 원리주의란 표현은 거의 쓰지 않으며, 이슬람 사회의 개혁적 노력과 반서구 탈피 운동을 ‘이슬람 개혁운동’, ‘이슬람 부흥운동’, ‘이슬람화 운동’ 등으로 표현한다. 개혁파들은 서구에 의해 지배당하고 왜곡된 이슬람 사회의 현상 타파를 위해 코란과 하디스에 충실한 삶의 회복을 꿈꾼다. 그러면서 무함마드가 다스렸던 메디나 국가 시절, 그리고 이어 나타난 7세기 초 ‘정통 칼리프 시대’로 돌아가자고 주창한다. 이러한 이슬람부흥운동도 구체적 실현 방식에서는 두 흐름이 격렬하게 충돌한다. 하나는 이슬람의 전통과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서구와의 공존과 협력을 중요시하는 사회적 지적운동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서구의 바이러스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기 때문에 아예 서구의 관행과 영향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이슬람의 원론적 가르침으로 회귀하자는 완고한 흐름이다.

무슬림형제단의 창시자 
하산 알 반나.

이슬람개혁운동 주도 그룹 ‘카와리즈파’

이슬람 사회의 현실이 처한 왜곡을 직시하고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움직임은 사실상 이슬람 역사 초기부터 있어 왔다. 최초로 이슬람개혁운동을 주도한 그룹은 ‘카와리즈파’였다. 그들은 7세기 중엽 이미 이슬람의 순수정신이 변질됐다고 주장하면서 당시 지도자들에 저항하다 대부분 순교했다. 카와리즈파들은 민족과 혈통 요소를 배제하고 철저한 신앙심과 덕목을 기준으로 지도자를 선출해야 하고, 신앙을 어긴 지도자는 배신자로서 살해돼야 한다는 극단적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순수성과 정통성을 강조하는 시장적 흐름은 대학자 ‘이븐 한발’을 거쳐 ‘이븐 타이미야’로 이어졌다. 이븐 타이미야는 이슬람의 다양한 해석과 토착문화와의 융합을 꾀하는 수피즘(이슬람신비주의)에도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처럼 극단적인 이슬람순수주의에 집착하는 세력들은 18세기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 주역들이 된다. 이들이 바로 사우디아라비아를 움직여 온 와하비즘 추종세력들이다.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가 가장 보수적인 이슬람 국가로 남게 된 역사적 배경이다.

이슬람과격주의의 아버지 
사이드 쿠틉.


19세기 말 이슬람 개혁운동은 대부분의 이슬람 세계가 서구 침략과 식민지를 경험하면서 좌절과 분노의 단계로 진입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자말루딘 아프가니였다. 그는 ‘범이슬람주의’라는 정치적 이슬람 이념운동으로 이슬람 세계의 통합을 꿈꾸었으며, 서구와 이슬람 세계의 대결보다는 합리적인 윈윈전략을 시도했다. 그는 모든 종파의 무슬림들에게 단합과 협력을 설파하고, 서구의 장점을 배우며 이슬람을 근대화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의 노선은 후일 수많은 근대 개혁운동의 실용적 근간이 되었고, 서구의 침략으로부터 범이슬람권의 단결과 연대를 도모하는 범이슬람주의(Pan-Islamism)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기도 했다.



1922년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의 창설

20세기 이슬람 사회 개혁과 각성운동은 이집트에서 꽃을 피웠다. 무함마드 압두와 언론인 라시드리다 등은 카이로에서 살라피야운동(al-Salafiyya:이슬람부흥운동)을 주창하면서 최초의 완전한 근대 이슬람 국가의 창설을 주장했다. 살라피야운동은 튀니지와 북아프리카로 퍼져가 오늘날 이 지역의 이슬람 개혁운동의 정신적 모태가 됐다. 이슬람 개혁운동은 결국 1922년 하산 알 반나의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의 창설로 이어졌다. 무슬림형제단에서 분파된 이슬람 현대적 저항조직들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하마스, 레바논의 헤즈볼라 등이다. 특히 1960년대 이슬람급진주의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 실천적 혁명가인 사이드 쿠틉을 빼놓을 수 없다. ‘진리를 향한 이정표’란 책에서 그는 서구와 타협하지 않는 이슬람 투쟁 이론을 완벽하게 정비하고, 무력을 동반한 총체적 이슬람 정신의 부활을 선동했다.



이슬람급진주의 기초 닦은 사이드 쿠틉

사이드 쿠틉의 급진적 이슬람 과격주의는 현실정치에서 샤리아(이슬람 법)의 시행과 집행을 사회적 가치의 근간으로 내세웠다. 소위 “서구를 이기기 위해 서구의 바이러스를 경험해야 한다”는 종래의 주류적 이슬람 개혁론자들과는 달리 한 치의 양보 없는 순수와 절대적인 이슬람 원칙을 강조했다. 나아가 미국과 이스라엘은 물론 그들과 협력하는 집권 이슬람 독재자들에게도 날카로운 공격의 화살을 퍼부었다.

특히 사이드 쿠틉은 말, 글, 협상을 통해 이슬람을 수호하던 종래의 소극적 지하드(성전)를 버리고, 폭력과 무장 투쟁을 통한 적의 궤멸과 순교를 찬양하는 적극적 지하드주의를 앞세웠다.

그의 저항의 메시지는 아직도 급진적 무슬림 계층에게 호소력 있고 매력적인 대안으로 남아 있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체첸, 팔레스타인, 시리아, 리비아, 예멘, 레바논 등지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아 끊임없이 가족과 동료들을 잃고, 삶의 기반이 초토화되는 왜곡된 현실에서 사이드 쿠틉의 저항적 사상은 종교적 보호울타리와 위안의 속삭임이 되기 때문이다. 사이드 쿠틉의 사상과 가르침은 파키스탄의 탈레반을 거쳐 결국 21세기 벽두에 알 카에다라는 급진적 반미 테러조직을 배태시켰다. 그리고 ISIL의 투쟁방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같은 무슬림형제단의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서구와의 협력과 공생을 도모했던 다른 사상가들과는 달리 사이드 쿠틉은 이슬람 우월론자였다. 이미 이슬람 경전과 체제 모두에 완벽한 해결책이 제시돼 있는데, 오염된 서구 문명과 자본기술 중심의 외피에만 매달리는 이슬람 패배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오늘날 알 카에다가 주장하는 논리와 아주 닮아 있다.

그에게는 아랍민족주의의 영웅이라는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조차도 이슬람의 적으로 간주했다. 이슬람의 범지구적 형제애 대신 아랍민족주의를 강조하고 이슬람 법 질서를 존중하지 않았던 타락한 지도자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사이드 쿠틉은 여러 차례 투옥되었고 결국 암살 음모죄로 처형당하고 말았다. 역설적이게도 극적이고 비극적인 운명을 살았던 그는 급진주의자들에게 순교자로 추앙되면서 후일 테러리스트들의 멘토가 됐다.



쿠틉의 시대적 절규, 갈수록 지지기반 잃어

여기서 분명한 것은 사이드 쿠틉의 시대적 절규는 더 이상 이슬람 주류 공동체에서 유효하지 않다는 점이다. 21세기 첨단의 시대에서 중세의 이슬람세계로 돌아가자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이슬람권 내에서도 갈수록 지지기반을 잃어가고 있다. 따라서 현재 주류적 이슬람 운동의 중심 담론은 이슬람의 가치와 가르침을 단단한 뿌리에 두면서도 서구의 앞선 기술과 과학, 심지어는 제도까지도 과감하게 수용해 서로가 화합하고 공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감수 : 국군기무사령부

<이희수 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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