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잊혀진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불붙은 독립 열정, 최초의 임정 ‘대한국민의회’ 뜨다

입력 2017. 12. 05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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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최재형 임정재무총장 선임


3·1운동 직후 연해주 한인들 대대적 만세 시위운동

상하이·한성에서도 독립 향한 임시정부 속속 수립

 




러시아의 10월혁명 과정에서 한인들은 일본군이 지원하는 10월혁명 반대세력인 백위파를 적대시했다. 이 과정에서 상당한 규모의 한인 의용병 부대가 구성돼 일제와 싸웠다. 연해주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서 결성됐던 전로한족회중앙총회가 대한국민의회로 개편돼 3·1운동 직후에 임시정부 성격으로 수립을 선포했다.


3월 17일 우수리스크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는 러시아 지역, 북간도, 서간도, 국내에서 온 독립운동 단체들을 대표하는 8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대한국민의회’가 결성됐다. 신한촌에 있는 한인들은 한민학교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해 조국독립의 열정을 불살랐다. 이러한 배경에서 러시아 지역에서도 한인사회 곳곳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문창범·김철훈·오창환 등 간부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한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평화적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러시아 한인 거주지역 여러 곳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대한국민의회는 국내외를 통틀어 최초의 임시정부라고 할 수 있었다. 대한국민의회는 3·1운동을 계기로 일제와 혈전을 벌이며, 의연금 모금과 군사훈련소 설치 등을 주도해 나갔다. 문창범·이동휘·최재형·김철훈 등이 중심인물이었다. 대한국민의회 간부로는 회장 문창범, 부회장 김철훈과 김 알렉산드르, 서기 오창환, 외교부장 최재형, 선전부장 이동휘, 재정부장에 한명세가 각각 선임됐다. 홍범도는 이동휘가 부장을 맡은 선전부에서 활동했다. 선전부는 얼마 후 군무부로 명칭이 바뀌게 되고, 홍범도의 근거지였던 다아재 골에 대한국민의회 군무부의 본부가 설치됐다.

 


 


대한국민의회는 독립운동 방식을 3단계로 나누어 수립했다. 제1단계는 독립선언서 발표와 가두시위 등 평화적 시위운동, 제2단계는 한인 무장세력에 의한 국내진입의 무장전쟁, 제3단계는 파리강화회의를 통한 외교활동이었다. 그러나 대한국민의회의 활동은 곧 러시아 정부의 제지를 받게 됐다. 일본의 비호를 받고 있던 백위파 옴스크 정부가 해산명령을 내린 것이다. 대한국민의회는 4월 29일 상설의회를 개최하면서 4월 13일 상하이에서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잠정 승인하고, 임시정부를 노령으로 이전할 때까지 완전 승인을 유보했다. 재러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와 가까운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로 임시정부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상설의회 의장 원세훈을 교섭대표로 상하이에 파견해 양측의 통합을 논의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총리에 이동휘, 교통총장에 문창범을 선임하고 있었다. 이어 4월에 중국 상하이에서는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민족운동가들이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서울에서도 13도 대표들이 모여 국민대회를 열고 한성 정부의 수립을 선포했다. 대한국민의회는 이동휘가 뒤늦게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하고, 문창범은 취임을 거부한 상태에서 1919년 12월 임시총회를 열어 독자적인 활동 재개 방안을 모색했다. 대한국민의회에서 이동휘와 함께 군무부의 책임을 맡게 된 홍범도는 이것을 대한독립군을 창설하는 계기로 삼았다.

 

연해주에 진출하는 일본군.

 


한편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신규식·이동녕·이시영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에 관해 논의했다. 4월 10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租界)의 김신부로에서 이동녕이 의장이 되어 제1회 의정원 회의가 개회됐는데, 이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국무위원을 선출했다. 이 회의에서 최재형은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출됐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대한국민의회에 이어 상하이와 한성에서 각각 임시정부가 결성돼 곧 세 단체의 통합 논의가 진행됐다. 그러나 완전 통합을 이루지 못한 채, 임시정부는 상하이에 두며, 임시의정원과 대한국민의회를 합병해 의회를 조직한다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의견에 따라 대한국민의회는 1919년 8월 해산을 결의했다. 이어 이동휘와 문창범이 구체적인 실무협의를 하기 위해 상하이로 갔다. 상하이에 가보니 상하이 현지에서의 통합 작업이 대한국민의회의 교섭 내용과 다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대한국민의회 측은 이에 반발해 문창범은 통합정부의 교통총장에 선임됐으나 취임을 거부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동휘는 11월 3일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반발한 대한국민의회이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민족주의적 색채를 지니면서 러시아 한인사회에서 한인의 정치력을 결집했다.


참고서적 및 참조글: 박환 저 『시베리아 한인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 문영숙 저 『독립운동가 최재형』,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국민의회(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문영숙 작가/안중근홍보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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